Page 6 - [남미복음신문_842호]2022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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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미복음신문  www.nammicj.net                                    오피니언                                              2022년7월29일 금요일


       ■ 여용주 목사의 역사탐방 ■                                         된 히오 지 쟈네이로 연합교회             기 위해 저스틴 스폴잉(Justin          목사를 통하여 개신교에 대한
                                                                새 교회당 건립에 큰 도움을              Spaulding) 목사가 1836년에        호감을 가지게 되어, 선교사역
                브라질 개신교회 역사 27                                  주었습니다.                       선교사로 파송받고 브라질로               의 많은 방면에서 큰 도움을

                                                                 감리교회 선교                     오게 되었습니다. 히오 지 쟈             주었습니다. 그러나 건강의 문
                       한 지붕 세       얼마 후 스위스 개혁교회 출신             이민자들이 세운 브라질의 첫             네이로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              제와 빈약한 후원으로 인하여,
                      가족            이민자들도 많이 들어와 함께             개신교회들은 교단 차원의 선              지 않아 그는 성경학교 사역을             키더 목사는 1840년에 미국
                        1827년  6    교회를 이루게 되어, 교회 회            교를 가능하게 한 발판이 되              시작하는데, 이것이 브라질에              으로 돌아가고, 이듬해 스폴딩
                      월 25일, 히      원의 다수가 개혁교회 출신들             었습니다. 한 교단의 해외선교             세워진 최초의 성경학교입니               목사도 철수함으로써, 감리교
                      오  지  쟈네      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순조롭            국이 브라질 주민들을 대상으              다. 학교가 점점 성장하자, 이            회 선교는 일단락되었습니다.
                      이로에 소재        게 성장하여, 얼마 안가 교회            로 하는, 현대적 의미의 선교             듬해인 1837년에 대니얼 키더
                      한  독일  프      이름을 “히오 지 쟈네이로 연            를 위하여 가장 먼저 선교사를             (Daniel P. Kidder) 목사와 로                     여용주 목사
       러시아 영사관에 13명의 독              합 개신교회”로 개칭하게 되             파송한 것은 미국의 감리교회              버트 머디(Robert M. Murdy)           (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일 이민자들과 프랑스 이민자              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였습니다. 1835년, 미국 조지           가 교육선교사로 히오 지 쟈네
       들이 모여 교회를 세우고 감사             다수인 브라질 제국에서, 루터            아 감리교회의 감독 오스굿 앤             이로에 와서 스폴딩 목사의 성             <5면에 이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독일인들              교회, 독일 개혁교회, 그리고            드류(Osgood Andrew)는 폰튼        경학교 사역을 돕게 되었습니               요즘엔 걷잡을 수 없는 인플
       은 루터교회 신자들이었고 프              프랑스 개혁교회 신자들이 모             피츠(Fountain E. Pitts) 목사     다. 또한 이들은 당시 공석이             레 벙커가 우리를 짓누르기도
       랑스인들은 개혁교회 회원들               여 한 교회를 이룬 것이었습니            에게 남미로의 선교여행을 권              던 미국 해군 함대의 군목으로             한다.
       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공             다. 말 그대로 ‘한 지붕 세 가          했고, 이에 그는 중남미의 동             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벙커에 빠졌을 때 나는
       식 명칭도 “히오 지 쟈네이로             족’인 셈입니다.                   부 해안을 따라 여행하였습니               키더 목사는 당시 미성년이              맥길로이를 기억하기로 했다.
       독일-프랑스  개신교회”라                회중의 수가 급속하게 늘자,            다.                           던 뻬드로 2세 황태자를 보필             두려워 말고 차분하고 자신있
       하고, 교회의 공식 예배 언어             이 교회가 처음에 소속된 브란             그는 주로 히오 지 쟈네이로             하는 브라질 제국의 섭정인 지             게 공략하기로... 인생길의 벙
       도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정했              덴부르크 노회에서 브레슬라              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는데, 그             오고 언또니오 페이죠(Diogo            커 탈출도 마찬가지 아니겠는
       습니다. 신앙고백서는 라틴어              우의 루드비히 노이만(Ludwig          결과 자그마한 감리교회 회중              AntÄnio Feij£) 신부와 자주 만      가? “두려워 말라”는 말씀
       판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Neumann) 목사를 담임 목회          이 생겨났습니다. 그가 여행              남을 가졌습니다. 페이죠 신부             붙잡고 가면 된다.
       서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자로 파송하고 사례비를 전액             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 브             는 자유주의 철학과 개신교 신
       으로 정하고, 예배식은 개혁교             부담하였습니다. 또한 브란덴             라질의 상황을 보고하자, 히오             앙에 큰 매력을 느끼던 사람                              조명환 목사
       회 예식문을 사용하였습니다.              부르크 노회는 1845년에 봉헌           지 쟈네이로의 회중을 목회하              이었는데, 학식이 풍부한 키더                  (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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