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 - [남미복음신문_836호]2022년 6월 17일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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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미복음신문 www.nammicj.net 오피니언 2022년6월17일 금요일
■ 여용주 목사의 역사탐방 ■ 에 임명한 포르투갈 인 또헤스 스파냐 국고에 큰 타격을 줄 는 개신교 교단이었기 때문에,
(Torres) 백작을 총사령관으로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복활동 네덜란드 또한 자국의 영토 및
브라질 개신교회 역사 21 하는 증원군을 파견했어야 했 이 일단락되자, 나싸우 총독은 식민지에서 타 종교에 대한 폭
습니다. 브라질 북동부를 탈환 식민지 각처에서 국민대표를 넓은 자유권을 보장해주었습
나싸우 총 그 후 한동안 뻬르넘부꼬 남 하려는 또헤스 백작과 나싸우 선출하게 하여 신대륙 최초 의 니다. 그 덕분에 유대인들은
독의 영토확 부 국경지대를 군사적으로 재 총독 간에는 크고 작은 해전이 회를 소집하게 하였습니다. 신대륙 최초의 유대교 회당을
장정책 패하고 안정시키는 것에 힘을 1640년 초까지 이어졌는데, 나싸우 총독의 종교정책 세 곳이나 지을 수 있었고, 인
브라질에 쏟은 나싸우 총독은 다시 수도 결국 네덜란드 군이 최종적으 브라질은 처음부터 로마 카톨 디오들과 흑인들도 자유롭게
도착한지 한 인 헤씨피로 돌아와, 이제 북 로 승리하여 또헤스 백작은 포 릭교를 국교로 하는 포르투갈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
달 만에 뽀 부지역 정복에 착수하였습니 르투갈로 철수하고 말았습니 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네덜란 었습니다. 로마 카톨릭교에 대
르또 까우보 다. 그는 먼저 5년 전 깔라바 다. 드가 점령한 북동부에도 많은 해서도, 그들이 네덜란드 정부
를 재탈환한 나싸우 총독은 남 르 대위의 도움으로 네덜란드 이듬해인 1641년, 나싸 성당이 있었습니다. 또한, 네 에 반기를 들지 않는다는 조건
쪽으로 달아난 에스파냐 군 총 와 동맹을 맺은 따뿌이아 족과 우 총독은 오늘날의 세르 덜란드가 브라질 북동부를 점 만 지킨다면 자유롭게 미사를
사령관인 바뉴올리 백작과 패 의 관계를 재확인하고, 그들의 지삐(Sergipe) 주와 마렁영 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럽 집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잔병들을 뻬르넘부꼬 주와 바 도움으로 히오 그런지 도 노르 (Maranhão) 주를 완전 정복 각지에서 핍박받던 유대인들 그 당시에 매우 파격적인 정책
이아 주의 경계인 성 프런씨스 치로부터 오늘날의 쎄아라 주 하여, 네덜란드 총독부는 브 중 상당수도 브라질로 이주하 이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국가
꼬 강(Rio São Francisco)의 남안 로 진출, 1637년 말까지 전 지 라질 식민지의 14개 사령부 였습니다. 에서 유대인은 핍박받거나 개
까지 추격하여 그곳에 마우리 역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에 성 (capitania hereditária: ‘도’와 당시 네덜란드의 국교는 개 종을 강요당하였고, 개신교도
츠 요새(Forte Maurício)를 건설 공하였습니다. ‘영지’의 개념을 혼합한 행 혁교회이기 때문에, 네덜란드 는 순교 당하였으며, 인디오와
하였습니다. 바이아 주에서 군 이듬해인 1638년, 나싸우 총 정구역) 중 7개를 차지하게 되 령 브라질도 네덜란드 개혁교 흑인은 열등한 인간으로 여겨
사를 모아 네덜란드에 복수하 독은 바이아 주의 군사적 움 었습니다. 브라질 북동부에 위 회를 국교로 하는 식민지였습 져 노예화되기 일쑤였기 때문
려던 바뉴올리 백작은 그러나 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수도 치한 이 사령부들은 당시 설탕 니다. 개혁교회는 종교의 자유 입니다.
결국 그곳에서 1640년에 죽음 지대를 공격하였고, 이로 인 생산 농장들로 인하여 경제력 와 양심의 자유, 그리고 결사 여용주 목사
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여 에스파냐는 브라질 총독 이 매우 높은 지역이어서, 에 의 자유를 3대 자유로 표방하 (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조명환의 추억여행] (Celtic Cross)도 이 나라에서 생 했다. 에딘버러를 거쳐 런던에 문했던 케네디 대통령이 이
산되었다. 아일랜드의 수호성 서도 며칠 여행을 하다보니 아 곳 골웨이를 거쳐 출국한 적
골웨이, 아일랜드 인 세인트 패트릭을 빼고 이 일랜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이 있는데 그의 이 마지막 방
나라 기독교 역사를 말할 수 를 한꺼번에 여행하는 스케줄 문을 기념하기 위해 1965년
없다.그런 아일랜드를 여행하 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내 마 이 광장을 케네디 기념공원으
는 것은 흥분과 설레임의 연속 음속에 환상적인 그림처럼 남 로 조성한 것이다. 골웨이에서
이었다. 그런데 그 나라를 처 아있는 최고의 추억은 역시 골 북 서쪽에 있는 킬러모어 애비
음 방문한 것은 수도 더블린이 웨이였다. (Kylemore Abbey)로 가는 길은
아니라 대서양을 향해 활짝 열 골웨이는 아일랜드 제3의 도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다. 하
려있는 서쪽 끄트머리 작은 해 시로서 2020년 기준으로 인구 루 정도를 잡아야 하는 자동차
안도시 골웨이(Galway)였다. 약 10만 명 수준이다. 당장 렌 여행길이다. 달력에 자주 등장
중세 도시 골웨이는 낭만이 흐 트카를 하면 운전자석이 오른 하는 아름다운 아일랜드 농가
아일랜드는 한국인과 비슷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르고 자연과 조용히 맞닿아 있 쪽에 있어 당황스럽기는 하지 풍경 속으로 빠져들어가 도착
게 한이 많은 민족으로 알려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 조나단 는 쾌적한 도시다. 만 금방 익숙해진다. 우선 도 하는 킬러모어 수녀원은 그 자
져 있다. 오랜 영국 식민지의 스위프트가 모두 이 나라 사람 NYU에 재학중이던 아들이 이 시는 깨끗하고 아름답다. 도시 체가 또 하나의 그림이다. 100
서러움, 대기근으로 인해 국 들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 골웨이 대학에서 한 학기를 공 중심에 있는 광장 이름이 에어 년 역사를 지닌 베네딕트 수녀
민 1/3이 죽거나 해외로 이주 성 4인조 크로스오버 그룹 켈 부하면서 남은 가족들을 그곳 스퀘어(Eyre Square). 여기에 존 원은 아름다운 호수를 앞에 두
해야 했던 아픈 배고픔의 역 틱 우먼(Celtic Woman)도 아일 으로 불러 아일랜드 여행에 나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상이 서 고 약 1천 에이커의 산자락에
사 때문인가? 그나라 노래인 랜드 출신이고 가수이자 작곡 섰던 것이 벌써 15년 전의 일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케네디 자리잡고 있다. 고요, 평화, 적
‘오 대니 보이’를 들으면 가 가 엔야(Enya)도 아일랜드 출 이다. LAX를 출발 런던 히드 가의 고향이 아일랜드 아니던 막이란 바로 이런 정경을 두
슴을 적셔오는 그런 한이 느 신. 아일랜드하면 떠오르는 기 로 공항을 경유하여 골웨이 가 가? 케네디 집안은 아일랜드 고 말하는 것이리라. 골웨이
껴진다. 아일랜드를 덮고 있 독교 성인, 누구인가? 바로 세 는 비행기를 타고 처음 아일랜 인 후손으로 19세기 후반 아 초입에 있는 성 니콜라스(St.
는 목가적인 자연 풍광도 연관 인트 패트릭이다. 켈트족이 정 드를 방문했고 골웨이에서 에 일랜드에 닥친 대기근으로 말 Nicholas) 교회당은 아일랜드
이 있을 것이다. 세계적인 시 착하여 드루이드란 원시종교 딘버러로 가기위해 더블린에 미암아 미국 매사추세츠주로 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당이다.
인이나 문학가가 그리 많이 배 를 믿던 이들에게 최초로 기독 들렀다. 더블린에서 역사적인 이주한 가톨릭 집안이었다. 이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
출된 것도 그런 연유가 있었 교를 전파한 이가 세인트 패트 트리니티 대학교와 헨델의 메 에어 광장을 지금은 ‘존 에 버스가 신대륙을 향해 떠나기
을 것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릭이고 켈트족이 숭배하던 태 시야가 초연되었다는 세인트 프 케네디 기념공원’으로 이 전에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고
자 소설가 사무엘 베케트, 시 양신의 상징인 둥근 원에 십자 패트릭스 교회당을 둘러보고 름을 바꿨다. 1963년 암살당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
인이자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 가를 합쳐서 만든 켈트 십자가 기네스 맥주공장을 가 보기도 하기 5개월 전 아일랜드를 방 다. <2면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