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 [남미복음신문_824호]2022년 3월 18일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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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복음신문 www.nammicj.net 오피니언 2022년3월18일 금요일 5
아래동네 문산리 ‘박세이’ 은 반찬을 여러 번 올리는 것 터로 남아 있기도 하고 가물
정찬성 목사의 복음자리 이야기
‘정촌말’은 우리 조상들이 ‘동막 무짠지’로 줄여 부르 이 심한 해에는 여전히 소금
아버지, 봄바람 흙냄새로 건강찾으세요 누대로 살던 곳입니다. 마리 며 반찬 투정을 하시던 모습 기가 땅위로 올라오는 것을
산 주봉을 중심으로 섬이 있 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하숙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권사님, 월대보름에는 거기서 쥐불놀 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커 을 하는 동안에도 ‘동막무 소금기가 약간 섞인 논이어
제가 어릴 이도 하는 곳입니다. 얼마 전 다란 갯벌이 있었고 그 바다 짠지’현상은 계속되었고 그 서 밥맛이 좋다고들 이야기합
때 밥상머 86을 일기로 세상 떠나신 어 를 건너면 진강산을 중심으 것이 수십 년이 지난 오늘에 니다. 그래서 강화도의 대표
리는 늘 활 머니는 당신이 확실히 이길 로 오늘날 양도면이 있습니 도 가끔 나타나는 현상입니 적인 쌀 브랜드 ‘강화섬쌀’
기찬 이야 수 있다고 판단되면 그러자고 다. 사리 물때 따라서 바닷물 다. 오늘도 둘이 먹는 밥상에 의 미질이 전국적 입니다. 유
기들이 있 동의하셨습니다. 우리 삼남매 이 넘칠 듯 넘실거리기도 하 서 ‘동막무짠지네’ 하면 벌 권사님, 브라질의 밤하늘에
었습니다. 는 머리가 클 때까지 그 밥상 고 조금 때는 실뱀장어처럼 써 다 알아듣고 배시시 웃습 도 한국과는 반대로 생긴 달
밥 먹을 때는 조용히 먹으라 머리에서 경쟁을 하고 협상에 물길이 가늘어지기도 했습니 니다. 들이 늘 싱그럽습니다. 달 힘
는 것이 그 당시 분위기였는 서 이기는 법, 벌칙을 주고 상 다. 선수 쪽 바다 입구와 사기 동막 무짠지와 강화섬쌀 으로 물때가 달라지고 조금과
데 우리 집은 늘 시끌벅적했 대방을 설득하는 법을 배우며 리 쪽 바다를 막으면 수천만 유권사님, 바다가 있었던 막 사리가 생기고 그게 자연스럽
습니다. 그 중에 아버지의 대 자랐습니다. 그 때 전수받은 평 육지가 생기고 엄청난 논 힌 땅은 빗물을 모아 놨다 바 게 고기잡이 어부들의 달력이
표적인 발언은 “‘빤스’(팬 승부에 대한 욕심이 요즘 가 밭이 생길 것을 안 우리 조상 다로 흘려버리길 여러 해 반 되고 간척사업을 한 수문을
티)만 입고 ‘달뵈기’까지 끔 두 식구 밥상머리에서 무 들은 주민들을 동원해서 간척 복하면서 염기가 빠지고 좋 닫고 여는 시간이 되었을 것
뛰어갔다 오기할래?”이었습 심결에 나오는 것을 발견하 공사를 했고 동막이란 이름이 은 논밭이 되었습니다. 그 넓 입니다. 양도와 화도 사이 가
니다.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고는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생겼습니다. 반찬이 없는 밥 은 땅은 가랑포라고 불렀습니 랑포에도 봄이 찾아오고 있을
때 지는 사람이 해야 하는 벌 밥상머리의 추억은 또 있습 상 머리에 며칠동안 계속 같 다. 양도에 있던 고려시대의 것입니다. 내일모래 구순이신
칙 제안입니다. 니다. 당시 가랑포에 대한 추 은 반찬이 올라오면 아버지는 가능을 관리하던 이들에게 준 우리 아버지 정헌채 장로에게
달뵈기와 가랑포 이야기 억입니다. 어릴 때 허옇게 소 슬쩍 ‘동막 하숙집 무짠지’ 땅 가능포가 가랑포란 구전이 도 봄바람에 실려 오는 땅냄
달뵈기는 우리 시골동네 교 금기 핀 논바닥을 보면서 물 아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처음 름이 된 것입니다. 그 간척사 새가 암치료중인 아버지를 논
회마당이 앞 동네로 달이 잘 어 알았습니다. 강화도는 원 날은 서너조각 굵은 무짠지 업에 동원된 주민들에게는 간 으로 불러내는 힘이 되었으면
보이는 곳입니다. 겨울에는 래 몇 개의 섬이 간척사업으 가 다음 날에는 채를 썰어 물 척지 땅을 잘라 임금으로 대 합니다.
곡식을 다 거둔 빈 마당에서 로 하나가 된 섬이라고 합니 김치처럼 나오고 그 다음날에 신 줬습니다. 지금도 그때 간 정찬성 목사
연날리기를 하기도 하고 정 다. 내가 어릴 때 살던 마리산 는 고춧가루에 무쳐 나와 같 척사업을 한 흔적이 초지낚시 (브라질선교교회 담임)
■ 여용주 목사의 역사탐방 ■ 하면서, 물리적으로 하나님 우 가뇽 총독과 식민지 치리회는 하며 안수하여 프랑스로 파송
편에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성 “사도시대로부터 성경을 가 한 소년들이었습니다. 빌가뇽
브라질 개신교회 역사 9 찬의 자리에 영적으로 임재하 장 잘 해명하는 이들 중 한 명 은 자신의 서한에서, “지난
셔서 친히 빵과 포도주를 나눠 인 칼빈 선생”에게 서한을 보 번 편지에서 제게 충고하신 것
첫 성찬식 약속 받았다고 주장하는 장 코 주신다는 교리를 입증하자, 식 내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매 들(즉, 식민지에 개혁교회를
프랑스령 앙타크(Jean Cointac)라는 인 민지 주민들은 제네바 목사들 듭짓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빌 세우고 요리문답 교육을 시행
남미의 치리 물이 성찬의 빵과 포도주에 대 을 더욱 따르게 되었습니다. 가뇽은 칼빈 앞으로 된 1557 할 것)은 모두 힘써 지킬 것입
회는 1557 한 교리에 의문을 표하였습니 수세에 몰리게 된 코앙타크는 년 3월 31일자 서한을, 리시에 니다” 라고 썼고, 목사들은
년 3월 21일 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 자신이 카톨릭 신학자로 몰리 르 목사와 샤르티에르 목사 역 “하나님께서 이 땅에 시작하
주일에 식민 는, 그것을 통하여 자기가 제 는 것이 두려워서, 자기는 로 시 칼빈 앞으로 된 1557년 4 신 것(즉, 개혁교회)을 끝내시
지 주민 모 네바 출신 목회자들보다 더 큰 마 카톨릭 신앙을 버린 지 오 월 1일자 보고서를 각각 작성 기를 기원합니다” 라는 말로
두가 참석하는 공예배 때 세리 영향력을 미쳐서, 마침내 교 래 되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하여, 니콜라 카르모(Nicolas 선교보고서를 끝맺었습니다.
지뻬 섬의 콜리니 요새 중앙 회를 양분하려는 것이었습니 그러자 리시에르 목사는, 그렇 Carmeau)의 손에 들려 프랑 하지만 이 보고서에는 또한 의
의 예배당에 모여 성찬식에 참 다. 자신이 파리 소르본느 대 다면 성찬예배 전에 온 회중 스로 보냈습니다. 그와 함께 미심장한 문장도 적혀 있습니
여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이 학 출신이라는 것을 내세운 그 앞에서 공적 신앙고백을 하여 인디오 소년 10명도 함께 태 다. “빌가뇽 총독은 옛 교사
성찬예배는 신대륙 최초 개신 는,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예 그의 신앙에 대한 의구심을 완 워 보냈는데, 이들은 총독 빌 들(즉, 중세 후기 카톨릭 신학
교 성찬식으로 기록되었습니 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 전히 떨쳐 버리는 것이 어떻냐 가뇽에게 노예로 팔린 아이들 자들)에 대한 큰 애정을 품고
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앞으 채설도 부인하고, 빵과 포도주 고 권하였고, 그는 내키지 않 로, 그가 해방하고 리시에르 있습니다.”
로 일어날 불화의 시발점이었 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공존한 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목사가 “이 땅의 민족 중 복 여용주 목사
습니다. 다는 공재설도 부인한다고 말 공적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 음의 첫 열매가 되기를 기원” (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성찬 논쟁 하면서도, 여전히 빵과 포도주 니다.
식민지 치리회가 3월 21일 공 는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주장 선교지 목사들의 첫 선교보고
예배 시에 성찬식을 가지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리시에르 서 금주의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결의하였을 때, 프랑스 대주교 목사와 샤르티에르 목사가 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에 대 말 씀
로부터 식민지의 주교 자리를 경과 고대 교부들의 글을 인용 한 논쟁이 계속 이어지자, 빌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