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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두 번째 호(통권 제 27 호)
6 커버스토리 사람과사회 People&Society
“류마티스 관절염은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통증 치료에 탁월함을 보여 온 성민산삼한방병원 서 영 수 원장
몸은 아픈데 왜 병명이 나오지 한 고통을 또 아픈 사람 혼자 짊 영수 원장을 더욱더 힘들게 했다. 서 원장은 “당시 내가 앓고 있었 서영수 원장은 “86년도에 전국
않지? 아파 죽겠는데…. 몸은 아 어져야 한다는 것이 삶 자체를 병명이라도 알았으면 덜 답답했을 던 병은 신음허였다. 부신기능이 에서 1위를 할때 연봉이 23만 달러
픈데 병명도 모르고 치료법도 회색빛으로 물들여 버린다. 텐데 이름도 원인도 몰랐다. 서 원 떨어지고 기억력과 기력이 떨어졌 였다. 하지만 그중 70%는 함께 일
모르고 진통제만 복용하면서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향해 장은 답답했다. 결국 자신이 앓고 다. 이때는 한방에서 육미장탕을 하던 15명의 에이전트들에게 돌
꾹 참고 살아야 하는 고통. 아파 한 마디 말을 경쾌하게 던진 사 있던 병을 찾기 위해 한의대에 입 처방한다. 하지만 당시 내 상황에 아가고 결국 30%를 가지고 전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하지 람이 있다. “류마티스 관절염, 결 학했다. 그것이 1985년이었다. 서는 이를 소화시키지 못하고 오 회사를 운영해야 했다. 이것저럭
만 조금이라도 그 아픔을 경험 코 불치병이 아닙니다”, “어떤 평생을 책을 보며, 책과 함께 살 히려 머리가 아프고 괴로웠다. 약 제외하고 나면 거의 남는 것이 없
해 본 사람은 그 고통과 두려움 통증도 치료될 수 있습니다” 경 아온 서 원장에게 공부는 그리 어 을 먹지도 못하고 침을 맞지도 못 을 정도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
이 얼마나 큰지를 안다. 쾌하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렵지만은 않았다. 영어가 아닌 중 했다”고 회고했다.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 기 확신에 찬 말 한마디, 지난 수 십 국어를 중간에서 통역을 두고 공 서 원장의 병은 한의 자격증을 서 원장은 결국 회사를 닫고 조
쁨과 즐거움은 순식간에 지나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통증에 부해야 한다는 점이 불편하기는 따는데 어려움을 겪게 했다. 아무 력자와 함께 작은 규모로 보험사
가고 지겨운 통증과 함께 몰려 서부터 자유롭게 해 준 성민산 했다. 하지만 서 원장은 밤을 낮으 리 읽고, 외우고 해도 막상 시험장 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병은 병대
드는 외로움까지… 이젠 혼자 있 삼한방병원 서영수 원장의 말 로 삼아 공부했다. 낮에는 일하고 에 들어서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로 해소되지 않고, 일은 일대로 해
는 것 자체가 두렵다. 천근만근 이기에 더욱 믿음이 간다. 밤에는 책을 봤다. 결국 한의대 자격증 시험에서 6번 결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학비도 벌어야 했고, 생활도 해 낙방이라는 쓴 물을 먹어야 했다. 서 원장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
아팠기에 간 대학 한의대 로 못 잤다. 계속 고통이 반복됐다. 야 했다. 한의공부도 해야 했고 보 공부만큼은 철저하게 준비했 로 어려움을 해결 하려고 노력했
서영수 원장이 한의학을 처음 시 실력이 좋다는 병원을 여기저기 험회사도 계속해서 다녀야 했다. 던 서 원장이었지만 병으로 인한 다. 그때 서 원장에게 새로운 희망
작한 것은 지금과 같이 한의학에 가도 병명조차 알 수 없었다. 중국 둘다 쉬엄쉬엄이라는 것은 서 원 증상만큼은 스스로 이겨내지 못 을 준 것이 바로 산삼이었다.
대한 열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인 의사가 운영하는 한의원도 다 장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것이 했다. 서 원장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
그렇다고 먹고살기 위한 삶의 수 녀 봤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 열매가 돼 1986년 웨스턴스테이 게 기억했다. “보험 할 때 알고 지냈
단을 찾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단 았었다” 트 보험사에서 실적으론 전국 1위 생계를 위해 산삼을 팔다 던 지인이 산삼을 팔아보지 않겠
지 서 원장 자신이 시름시름 앓았 1981년 미국으로 이민와서 먹고 를 달성했다. 이런 와중에 서영수 원장은 삶을 냐고 하면서 산삼을 공급해 주기
기에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 살기 위해 제대로 쉬지도 않고 일 하지만 자신의 병명을 스스로 위해 이어오던 보험회사도 접어야 로 했다. 미국에서도 산삼은 귀해
으면 하는 바람으로 길을 찾아 나 만 해 왔던터라 몸이 상할 때로 상 찾아보겠다고 한의를 시작한 서영 했다. 전국 1위를 할 정도로 실적 서 특별한 딜러십을 가지고 있어야
선 것이었다. 한 상황이었다. 수 원장의 당초 목적은 쉽게 풀리 은 좋았지만 막상 손익계산을 했 했다. 받은 산삼을 학교에 가지고
서영수 원장의 말이다. “당시 기 보험사 일에 한참 재미를 붙였 지 않았다. 주경야독은 서 원장의 을 때는 허울 좋은 그림자에 불과 가서 확인해 보니 교수들도 산삼
운도 없고, 밥맛도 없고, 잠도 제대 던 때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은 서 몸을 더욱 상하게 했다. 했다. 이 맞다고 했다”
한인 모 씨는 서영수 원장을 만나러 올 때만 해도 제대로 걷지조차 못했다. 하지만 4일동안 치료를 받고 당당하게 걸어서 병원을 나갔다. 자신이 치료받은 과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한인TV 방송
을 통해 광고로 사용하도록 했다. YTV 광고 캡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