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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두 번째 호(통권 제 27 호)
사람과사회 People&Society 커버스토리 7
순간을 환자들에게 경험시켜 오 발음이 더 정확해지는 순간순간
고 있다. 을 맞게 됐다.
환자들의 대부분은 오랜 이민
치료 안 되는 통증은 없다 생활에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
시간이 갈수록 서영수 원장의 치 하고 일해 온 탓에 쌓인 통증. 고통
료능력이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 스러운 통증에서 벗어나게 한 것
다. 그리고 그의 탁월함은 애틀란 만으로 새로운 삶의 희망이 됐다.
한의원에 들어서면 감사장과 타에서부터 빛을 내기 시작했다. 서영수 원장의 소문은 멀리 한
감사패들이 즐비했다. 그중에
서 원장이 가장 아끼는 것은 다이어트 치료로 알게 된 사람의 국에까지 알려졌다. 이름만 대면
2007년 세계프로격투기대회 소개로 애틀랜타를 방문한 후 지 알 수 있는 가수와 영화배우들이
에서 챔피언에 오른 심영희 사 인을 만나 치료를 했다. 서 원장에게 침을 맞고 치료를 받
범의 부상을 치료해 주고 받은
‘대통령 표창’(오른쪽) 이다. 그리고 하나 둘 많은 사람들이 았다.
몰려왔다. 우연히 시작된 진료는 서영수 원장은 “류마치스 관절
서영수 원장을 그때부터 산삼을 그것이 산삼의 효과였다” 기 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눴다. 그 치료의 과정이 됐고 서 원장의 치 염은 더이상 불치병이 아니다. 제
팔기 시작했다. 부족한 생활비를 리고 대학원에 진학해 보니 그 사 료로 효과를 본 사람들은 누구의 대로 된 시술만 있으면 고통에서
마련하기 위해서도 또 한 번의 새 도가 트이듯 깨달아지는 ‘침술’ 람도 대학원에 입학해 있었다. 대 권유도 없이 지인들에게 소문을 벗어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로운 시도를 시작했다. 장사는 그 면허증을 따고서 한의원을 오픈했 학원 동기가 된 거다”고 말했다.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삼의 효능을 그대로
에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 다. 하지만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깊었다. 함께 하나둘 몰려오기 시작한 사람 담은 산삼금옥단과 도인백사단은
만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산삼 학교에서 배운대로 침술을 해 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살려 들은 어느덧 잠시 쉴 틈도 없이 모 신장과 심장의 기능을 강화시켜
을 복용해보겠다는 생각은 꿈에 지만 환자는 호전되지 않았다. 그 다른 사람이 시도해 보지 않은 일 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일들이 애 장기에 조화를 이끌어내는 명약
도 하지 못했다. 런 경험이 늘어날수록 서 원장은 들을 만들어 갔다. 친해지면서 서 틀란타를 갈 때마다 늘어났다. 그 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서 원장에게 기회가 자신감을 잃어갔다. 한 달 내내 번 로의 장점을 알게 됐고 서로의 약 리고 7년 동안 환자들의 요청으로 “몸은 아픈데 왜 병명이 나오지
왔다. 중간에서 산삼을 공급해 줬 돈이 90달러였다. 점을 알게 됐다. 애틀란타를 방문했다. 않는가?” 서영수 원장을 한방으로
던 지인이 사라졌다. 산삼을 보내 서영수 원장의 말이다. “학교에 “하루는 내게 침을 배워 보지 않 다이어트 치료에서부터 시작된 이끌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는 곳에서 아무리 연락해도 연락 서 침을 놓으면서 배운 것이 아니 겠냐고 물었다. 나는 똑똑한 사람 진료는 점점 중증의 병을 치료하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은 서 원장
이 닫지 않았다. 결국 자연스럽게 라 침 자리에 딱지를 붙이면서 배 이 아니라고 말하자, 자신이 알고 는 것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귀가 은 모든 병에는 그 원인이 있고 그
서 원장이 그 일을 맡게 됐다. 웠다. 이론은 다 알지만 실제로 해 있는 것은 많은데 이를 가르쳐 줄 먹었던 사람이 듣게 되는 순간을 것을 풀어주는 것이 한방이라고
그때부터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 보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늘 하던 사람이 없어 그렇다며 설득해 왔 맞게 되고, 말이 어눌했던 사람이 믿고 있다.
아픈데 병명조차 몰랐다. 답답한 마음에
스스로 병을 찾기 위해 한의대 문을 두드렸다 …
장난처럼 던진 말 한마디로 산삼을 다려 먹었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기억력이 되살아났다
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산삼 것이 지압이었다. 지압을 해주고 다”고 기억했다.
도 보다 큰 것이 공급되고 판매도 번 돈이 고작이었다. 약도 만만하 서 원장은 바로 그 자리에서 침
성민산삼한방병원 서영수 원장이 자신이 촬영한 캐년 사진 앞에서 포즈
원활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서 지 않았다. 처방에 따라 감기약을 을 배우겠다고 동의하고 병원을 를 취하고 있다.
영수 원장은 아내에게 장난처럼 만들어도 들지 않았다” 나섰다. 그날 서 원장은 또 한 번의
“산삼 한 번 다려 봐”라고 말을 건 서 원장은 고민했다. 아무리 먹 체험을 했다. 자신의 지식 속에는 다재다능한 산삼 전문가 서 영 수 원장
냈다. 그 말에서 사고가 났다. 덜컥 고 살길이 없더라도 이 상태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이, 채 정리
3파운드 정도의 산삼이 서 원장을 환자를 보면 환자들이 상하겠다 되지 않은 것들이 지인의 한 마디 성민산삼한방병원 서영수 원장 장을 역임했다. 지난 1990년부
위해서 다려졌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환자를 에 정리되면서 도가 트이듯 원리 은 세계야생산삼연구소 대표 터 1994년까지는 로스앤젤레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돈으로 더 이상 보지 않았다. 가 이해됐다. 를 겸임하고 있을 정도로 남가 스 한인회 총무이사로 활발한
따지만 큰돈이 었다. 다린 것을 모 그리고 산삼 판매에 집중했다. “다 알고 있었던 것인데 머리 속 주 한인사회에서는 산삼 전문 활동을 했다.
아서 아침, 저녁으로 먹었다. 4개월 영업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그러 에서 정리가 안 되고 뒤죽박죽이 가로 잘 알려져 있다. 한의학의 우수성과 산삼의
정도 먹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던 어느 날 산삼을 구매하러 온 한 었던 것들이 하나로 정리가 됐다. 서영수 원장은 한의학 박사 효능을 꾸준히 알려와 미주 한
런데 계속 복용한던 중 내 기억력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자신을 침쟁 그리고 그분은 침을 놓고 나는 뜸 로 동국대학교(LA) 교수와 총 인사회에서는 산삼 전문가로
이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라고 소개했다. 서 원장은 침으 을 뜨면서 침을 익혀갔다” 동창회 회장을 역임했다. 유인 알려져 있다. 한인사회에 잘 알
서 원장은 놀라운 체험을 했다. 로 병을 치료할 수 있냐고 물었다. 하루 아침에 된 것이 아니었다. 대학교 한방대학원에서 학생들 려진 라디오서울과 라디오코리
그렇게 외우려고 해도 외워지지 답답한 마음을 풀어 놓은 순간이 날마다 읽고 외우고 공부한 것이 을 가르쳤으며 경산대학교 교 아, 우리방송 등에서 건강강좌
않았던 것이 깨달아지고 기억나기 었다. 한 번 물고가 트이면서 기억력이 수겸 총무이사로 활동하기도 를 진행한 바 있으며 지역의 TV
시작했다. 그 경험은 서영수 원장 그렇게 처음 만난 인연은 침술 되살아나자 익혀 온 것들이 활용 했다. 한의학박사협회 회장을 에서 통증에 산삼이 어떻게 반
을 정식 한의사로 활동할 수 있도 에 있어서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 되기 시작했다. 역임한 바 있다. 응하는지 효능을 알려 오기도
록 ‘합격’으로 이끌었다. 로 이어졌다. 그때부터 서영수 원장은 남들보 한방에 대한 학문적인 업적 했다.
“시험장만 들어서면 하나도 생 서영수 원장은 “그때 그렇게 대 다 뛰어난 침술을 가지고 있다는 뿐 아니라 커뮤니티 활동도 적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활동하
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 그때는 달 화를 나누고 산삼을 싸게 줬다. 그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양 극적이었다. 남가주 필하모니 기도 했다. 미 서부지역은 물론
랐다. 시험에 나온 문제 70% 정도 리고 한 달 후에 그 사람이 또 왔다. 한 약을 개발하고 산삼의 효능을 오케스트라 총재로 활동한 바 전국을 돌며 작품 사진을 찍어
를 시험을 보면서 외울 정도였다. 산삼의 효과가 좋다며 이런 이야 확인하면서 놀라운 치료의 순간 있으며 기독한의사협회 이사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