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 - [남미복음신문_837호]2022년 6월 24일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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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미복음신문  www.nammicj.net                                    오피니언                                              2022년6월24일 금요일


       ■ 여용주 목사의 역사탐방 ■                                         다. 이것은 신대륙 최초 개신             한 예수회 선교사들에 대한 반             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선
                                                                교 노회 조직으로, ‘네덜란드             감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이             교사역의 초점이 목회자들의
                브라질 개신교회 역사 22                                  개혁교회 브라질 노회’ 라는              ‘브라질 대회’는 1642년부             설교뿐아니라 교사들의 개신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터 1646년까지 활동을 지속하            교 교육에도 맞춰져 있었기 때
                       네덜란드령        자들을 상대로 사역이 진행되             또 6년 후인 1642년에는 브라           였습니다.                        문입니다. 즉, 그들은 브라질
                      브라질의 개        었지만, 헤씨피와 올링다에 여            질에 벌써 22개의 개혁교회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브라질              을 단순히 종교적 선교의 대
                      신교회           러 교회가 세워진 후로는 포르            이들을 섬기기 위한 50여명의             선교정책                         상으로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        투갈인 전도와 흑인 및 인디오            목사들과 25명의 장로들, 그리             네덜란드령 브라질의 개혁교              문화선교의 대상으로도 바라
                      연합공화국         선교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고 고아들과 과부들 및 병자들             회 노회들은 본국에 목사들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의  국교는         이를 위하여 본국에서 많은             을 돌보는 100여명의 집사들             파송해달라는 청원을 수시로               교육도 선교적 관점에서 바라
                      개신교 교단        목회자들이 파송되었습니다.              이 있어서, 하나의 노회로 계             넣었습니다. 그 이유는 네덜란             보고 있었기 때문에, 서인도회
       중 하나인 개혁교회였습니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로마 카            속 존재하기에는 행정업무와               드 개혁교회의 선교정책이 목              사가 파견한 11명의 교사들은
       1624년에 한 곳이었던 개혁교            톨릭의  핍박을  당하여  해당           처리속도 및 비용이 부담스러              회와 선교를 분리하지 않고 하             모두 교회에서 주일성경학교
       회는 1630년에 두 곳이 되었            지역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           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6             나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목회             교사로 사역하는 사람들이었
       습니다. 그 후 브라질의 식민             고, 어떤 이들은 에스파냐 군            년 전에 세워진 ‘브라질 노              자가 따로 있고 선교사가 따로             습니다. 이 두 방면의 선교는
       지화가 진행됨에 따라 유럽의              에 살해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회’를 ‘뻬르넘부꼬 노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             매우 빠르게 결실을 맺었습니
       개신교인들이 자유를 찾아 뉴              러나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이             와 ‘빠라이바 노회’로 나누              기 때문에 1647년까지 본국에            다. 네덜란드 선교 30년간, 그
       네덜란드로 이민을 왔고, 이들             에 굴하지 않고 식민지의 주             고, 다시 이 두 노회가 식민지            서 파송한 54명의 목사 중 약            들은 네덜란드 어와 포르투갈
       을 보살필 목사들이 브라질로              요 도시에서 지속적인 선교사             의 모든 교회를 포함하는 상위             19명이 선교사역에 직간접적              어 및 라틴어에 능통하여 차세
       파송되었습니다.                     역과 교회개척사역에 힘쓴 결             회의인 ‘브라질 대회’를 조              으로 헌신하였습니다.                  대 목회자와 교사로 섬길 수
        그러나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과, 1636년 12월에 헤씨피에          직하게 되었습니다. 가히 기하              브라질의 개신교회는 이렇게              있는 수많은 인디오 청년 인재
       처음부터 선교적인 교단이었               서 개신교회들의 지역 회의인             급수적인 성장이라고 할 수 있             목회자 파송 청원을 한 것만큼             들을 배출해냈던 것입니다.
       습니다. 식민지화가 막 시작              노회를 조직하기에 충분한 수             는데요, 그 배경에는 에스파              이나 서인도회사에 지속적으                               여용주 목사
       된 단계에서는 주로 유럽 이민             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             냐의 압제와 에스파냐가 파송              로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청원                  (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 강태광 목사의 기독교 인문학 강의(46) ◎                              아리스토불루스에게  대제사               성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 유             하지 않고 옥타비아누스를 찾
                                                                장직을 빼앗긴 힐카누스편에               대인 특징이었습니다. 특히 포             아가 설득합니다. 헤롯은 왕의
        인문학으로 읽는 신약성경 “신구약 중간기 왕조들”                             서 싸우며 영향력을 키우던 안             로기 이후에는 혈통의 순수성              옷을 벗고 일반 평민 복을 입
                                                                티파테르는 로마 폼페이 장군              에 더욱 집착을 했습니다. 이             고 카이사(옥타비아누스, 가이
                         하스몬 왕      는 군대를 이끌며 나라 안정을            을 끌어들여 유대 세력을 평정             런 점에서 헤롯의 혈통은 큰              사 아우구스도)앞에 나아가 자
                        조는 다른       꾀합니다. 하지만 권력 다툼을            합니다. 그리고 힐카누스를 대             약점이었습니다. 헤롯은 하스              신의 입장을 어필합니다. 헤롯
                        왕조와 마       평정한 안티오쿠스 7세가 예             제사장에 세우고 자신은 권력              몬 왕가 후손과 결혼하면서 자             이 카이사에게 어필한 내용은
                        찬가지로        루살렘을 침공하여 큰 위기를             을 잡습니다.                      신의 약점을 보완하려고 노력              대략 이렇습니다. “저는 저를
                        내부 권력       만납니다.                        BC. 47년 율리스 시저(Julius       합니다.                         세워준 안토니를 지지할 수밖
                        다툼을 시        힐카누스는 이 위기를 슬기롭            Caesar)는 안티파테르에게 로            헤롯은 혈통 등의 문제로 유             에 없었습니다. 그는 저의 은
                        작으로 몰       게(?) 해결합니다. 우선 화친을          마 시민권과 유대지역 총독 자             대 백성들과 유대 땅의 세력가             인이었고 저는 그를 위해 충성
       락하기 시작합니다. 마카비 혁             제안하고 다윗왕의 묘를 열어             리를 줍니다. 헤롯 가문의 로             들에 인정받는 것은 실패했지              을 다했습니다. 저는 그와 함
       명을 일으킨 맛디아의 세 아들             삼천 달란트를 안티오쿠스 7             마정권과 밀월이 시작됩니다.              만 로마 황실과는 좋은 관계를             께 패했습니다. 저는 패자의
       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혁명을              세에게 바쳤고, 유대인 군대를            그가 유대를 차지한 야심 많은             유지합니다. 헤롯은 격변하는              입장으로 폐하의 은덕만 보고
       이끌었습니다. 셋째 아들 유다             셀레우코스에 보내 안티오쿠              아들 헤롯을 갈릴리 지역 통치             로마 정세의 능선을 타고 권              나왔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살
       마카비, 다섯째 아들 요나단이             스 7세 편에서 전쟁을 합니다.           관으로 임명합니다. 영리한 헤             력을 유지하거나 확장해 나갔              아온 성실과 의리를 봐 주시고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             그 대가로 유대의 종교적 자유            롯은 권력의 메커니즘에 관해              습니다. 헤롯은 주군이 망해도             저에게 기회를 주시면 남은 생
       들 시몬이 이끌며 셀레우코스              와 평화를 보장받습니다. 힐카            서는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습              자신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헤             명 황제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
       왕국의 실력자들이 무시할 수              누스는 안티오쿠스 7세가 실             니다. 그는 유대 하스몬 왕가             롯왕은 처음엔 카시우스편에               습니다.” 거칠게 간추렸습니
       없는 독립운동 세력이 되었습              권하자 독립선언을 하고 영토             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 하스몬             섰고, 카시우스가 안토니에 패             다. 헤롯의 야심과 야성 그리
       니다.                          를 확장합니다. 힐카누스가 이            왕가에 대한 열등감을 정리하              하자 안토니로 갈아탑니다. 안             고 진심이 가득 담긴 일종의
        시몬이 하스몬 왕조를 선포하             두매 지역을 정복하고 많은 이            고 로마 실력자에게 충성을 다             토니가 헤롯을 유대 왕으로 임             사나이 고백이었습니다.
       고 유대인의 독립왕조를 시작              방인들을 유대교로 개종하게              했습니다. 헤롯은 천재성이 번             명했습니다. 안토니와 옥타비               로마의 실력자 카이사(옥타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몬의 사             합니다.                        뜩이는 정치 감각과 근성으로              아누스가 싸울 때, 헤롯은 안             아누스)는 헤롯의 이 말을 듣
       위 프톨레매오가 시몬과 두 아              이렇게 많은 이방인들이 유대            로마 권력을 붙잡았습니다.               토니를 돕습니다. 그런데 옥타             고 통 큰 로마 황제답게 헤롯
       들을 살해하고 반란을 꾀합니              교로 개종할 때 헤롯의 아버지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 출             비아누스가 이깁니다.                  을 수용합니다.
       다. 하지만 시몬의 셋째 아들             안티파테르도 개종합니다. 그             신 헤롯이 유대지역을 통치하               이런 상황에도 헤롯은 포기                           <3면에서 계속>
       힐카누스가 살아남아 가문의               리고 복잡한 유대 정치상황을             는 사람이 되는 것을 탐탁지
       명맥을 유지합니다. 힐카누스              틈타 권력을 잡습니다. 동생             않게 여겼습니다. 혈통의 순수               남미복음신문 www.nammicj.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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