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 - 11102022 크리스천헤럴드(19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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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2년 11월 10일 (목)                                          오피니언                            www.christianherald.com


           교수칼럼

                                                신학, 공부해야 하는 이유






                                      교를 위해 설교학을 공부하고, 교           가 없다는 마음이다. 조직신학을            그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            않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 집으로
                                      인 상담을 위해 상담을 전공하며,           가르치는 자로서 좀 씁쓸하다.             야 한다. 바른 이론을 알아야 바           보낸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나
                                      성도들의 영성을 키우기 위해 영               그러나 교회 현장에 당장 쓸           른 실천이 나오는 법이다. 기본이           쁜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성학을 공부하고, 효과적 선교를            수 있는 것만을 강조하는 태도는            중요하다. 줄넘기도 하나씩 하는            데 반전이 일어난다. 오벧에돔 집
                                      위해 선교학을 공부한다. 이런 흐           신학의 중요성, 특히나 이론 신학           것이 기본이다. 여기에 이단 뛰기,          이 하나님의 궤를 보관했기에 복
                                      름이 무엇 나쁘겠는가마는 생각             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삼단뛰기, 뒤로 뛰기, X자로 뛰기          을 받는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
                                      을 좀 해보자.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장           등 다양한 형태들이 응용되어 나            이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
                                          흔히 신학을 나무에 비유해 4         로회신학대학교  윤철호  교수도            왔다. 기본이 먼저며 기본이 근본           기고자 한다. 복 받기 위해서였다.
                                      개 분과로 구분한다. 성서신학이            언제가 이 비슷하게 이야기한 적            이다.                          바람직한가? ‘화와 복’에 따라 하
                 박   동   식  교수        뿌리요, 역사신학이 몸통이요, 조           이 있다. 이론 신학도 이론만 연            이론 신학을 잘 배우고 그 배운           나님의 궤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
           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교수          직신학이 가지요, 실천신학이 열            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위한            것을 실천 현장에서 잘 적용하는            하는 것은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신학 부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학 무용론“이 만연하다. ‘신학                                                                                                 장기적으로 바라보며 목회자를
         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론 신학을 잘 배우고 그 배운 것을                                               잘 양육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
         다,’ 혹은 ‘신학이 교회에 유익을                                                                                                 할 것이다. 그러니 공부할 때 부
         주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신학대                     실천 현장에서 잘 적용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지런히 공부하자. 교회와 목회 없
         학원 다닐 때, 대형교회 목사님들                                                                                                  는 신학은 공허하지만, 신학 없는
         이 채플에 오셔서, 신학 공부보다                                                                                                  교회와 목회는 맹목적이다. 신학
         목회 준비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교 때 공부가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자주 하시곤 했다.                   매다. 학생들에게 어디에 관심이            이론을 연구하는 것이다. 에스라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러지            있다는 마음으로, 목회 성공이라
         그 말을 들은 신학생들이 어떤 마           있냐 물으면 대부분 실천신학 쪽            가 율법을 가르칠 때 태도를 보            않으면 유용한 것, 실용적인 것만           는 헛된 꿈만을 키울 것이 아니
         음을 품었겠는가. 큰 교회를 맡으           이다.  그래도  성경은  깊이  있게        자.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움직인다. 신앙도 번영만을            라,  엉덩이  의자에  붙이고  성경
         려면 신학 공부보다는 교회를 성            연구해야 한다는 당위적 의무가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             추구한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이  무엇을  말하는지,  신앙의  선
         장시키는 것에 더 관심을 둬야 한           있어서 성서신학에 관심 있는 이            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아비나답             배들은 무엇을 고민했는지, 그런
         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지금            들도 꽤 있다.                     심하였더라”(스 7:10). 에스라는         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옮기는 도            선상에  있는  자신은  무엇을  해
         도 이런 모습은 여전하다. 과연 바            하지만  역사신학과  조직신학,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연구만 하            중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른다. 그           야 하는지를 배우며 고민하는 시
         람직한가?                        특히나 조직신학은 별로 관심이             지 않았다. 그는 그 말씀을 연구           때 소들이 날뛰자 아비나답의 아            간이기를 소망한다. 기독교가 하
             그런 목표 의식을 가지니 신학         없다. 복잡하기만 하고 교회에 별           하고 ‘지키고’ 그 율례와 법을 이          들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잡는다.           락하는 후기 기독교 시대(Post-
         을 하더라도 ‘실천신학’이 주류를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            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데            그는  즉사한다.  이  소식을  들은        Christendom)에 굳이 신학을 공
         이룬다. 당장 교회 현장에서 유용           이다.  당장  교회  현장에  그렇게        헌신했다.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             부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할 수
         하게 쓸 수 있는 신학을 한다. 설          필요하지 않은 것을 공부할 필요                 말씀을  준행하기  위해서는         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지             있을 것이다.


           어리버리 서목사의 낚시 전도법 (3)

                                                              제자와 판매자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복음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예수님            매자가 될 수 있다.                  그 시간을 통해 내가 서야 할 자리
                                      을 전하기 원하신다. 예수님께서            의 제자였던 가롯 유다는 돈 몇 푼           가롯 유다가 돈과 예수님을 트            를 결단하게 되었다. 팬이 아닌 성
                                      는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구하는            에 예수님을 파는 판매자가 되어            레이드(trade) 한 것처럼 우리도         도, 판매자가 아닌 제자가 되기로
                                      일이 가능하도록 필요한 모든 능            버렸다. 예수님을 팔기로 이미 판           할 수 있다. 어디 돈뿐이겠는가?           결단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력과 은사를 주신다. 우리가 잘 아          을 다 짜놓고, 태연스럽게 예수님           예수님과 바꿀만한 세상 즐거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도법을 정
                                      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 중 사회          앞에 나와 입맞춤을 했다. 가롯 유          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를 유혹            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노력
                                      적으로 엄청난 지위와 능력을 소            다라는 이름에 수식어가 붙는다. ‘          하는 것이 세상에 널려 있지 않은           과 달리 이 일은 전혀 쉽지 않았
                                      유한 자가 있지 않았다.                예수를 판 자’. 가롯 유다는 다른          가? 이미 성경에는 예수님과 바꿀           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출근을 위
                                        오히려 평범에 가까웠던 사람                                         만한 것들을 산더미와 같이 기록            해 샤워를 하면서 전도에 관한 여
                 서   민   수   목사       들이었다. 그런 그들로 사람을 구                                        하고 있다. 그런데 나만큼은 판매           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방주교회 담임             하고 생명을 구하는 제자가 되게                                         자가 아니라고, 가롯 유다가 아니           데 그때 갑자기 내 머리를 때리는
                                      하셨다.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할                                        라고 꿋꿋하게 말할 자신이 있는            물줄기처럼  머릿속을  강타하는
                                      수 있는 능력의 사람으로 세워주                     제자가                 가?                           말씀이 있었다.
         내가 하고 싶고 되고 싶은 일을 선          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제자                                         제자와 판매자 사이에 모호한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많이 듣
         택하는 순간, 우리는 그 선택에 대          로 부르신 예수님의 약속이다.                   되지 않으면                 회색인은 없다. 제자와 판매자 사           고 자랐던 말씀이었다. 평소에도
         한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가 팬으            영혼  구원은  바로  제자가  하             예수를 맞바꾼                 이에 은근슬쩍 서있을 수 있는 회           신약을 통독할 때마다 몇 번이고
         로 남고 싶다고 팬으로 사는 것을           는 일이고, 예수님은 우리가 모두                   판매자가                 색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심            읽었던 말씀인데 그 날따라 나의
         선택했다면, 훗날 주님 앞에 섰을           그 일을 하기 원하신다. 제자 되                                        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제자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지
         때 주님은 우리에게 그 선택에 대           는 것이 싫고 힘드니, 그냥 팬으                  될 수 있다                부르신 엄중한 예수님의 부르심             체하지 않고 그 말씀의 영어 번역
         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예수님께           로서 응원만 하겠다고 결정하면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            을 찾았다. 그리고 그 안에 선명하
         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            그것은 예수님의 뜻과 부르심을                                          다. 다양한 크리스천 문화와 화려           게 기록된 ‘FISH’라는 단어에 마
         게 제자로서의 사명을 주셨다. 그           거부하는 것이다. 제자와 팬으로                                         한 설교와  여러 교회 활동을 즐기          음이 꽂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물
         리고 승천하시면서 성도들에게도             의 결정에 대한 책임은 우리 각                                         는 팬인지, 언제라도 예수님보다            고기란 네 단어에 그동안 고민했
         동일한  사명을  주셨다.  “제자가         자가 져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으로             더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것을 선            던 모든 전도에 관련한 내용이 들
         되어 제자를 남기라.” 바로 이것           팬으로 산다는 것이 문자처럼 그            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제자가 될           택할 수 있는 판매자인지, 죽기 전          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예수님이 성도와 교회에 주신            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가 잘 아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제자           에 예수님 앞에 서기 전에 우리 자           나는  그  모든  내용을  ‘물고기
         사명이다. 명령이다. 성도를 부르           는 가롯 유다는 제자로서 부르심            되기를 거부했고, 종국엔 판매자            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FISH)’라는  네  개의  영어  단어
         신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분명한             을 받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제           가 되었다. 교회를 다니고 예배에            프로가 되기 위해 애쓰고 힘쓰            안에 빠른 속도로 정리해 넣기 시
         이유와 목적이 있는 것이다.              자가 되지 못했다. 그것이 끝이 아          참여하지만, 제자가 되지 않으면            고 때로는 절망하는 아들을 통해            작했다. 이 ‘물고기(FISH)’라는 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도가 제            니었다. 그는 제자가 아닌 판매자           누구나 할 것 없이 언제라도 예수           몇십 년간 신앙생활을 해온 나 자           단어를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 바
         자 되기를 원하신다. 제자가 되어           가 되었다.                       님을 다른 것과 맞바꿀 수 있는 판          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로 ‘낚시 전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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