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 - [남미복음신문_834호]2022년 6월 3일 지면보기
P. 6

6    남미복음신문  www.nammicj.net                                    오피니언                                                2022년6월3일 금요일


       [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                                          한 아시안 또라이... 내 뒤통수           걸 처음부터 다시 프로세스를              (dehumanization)란 불행한 도
                                                                에 대고 그런 소리를 중얼대는             하라고 하면 간당간당한 비행              전이다. 많은 고객들이 키오
                     키오스크 공포시대                                  것 처럼 느껴졌다. 핫 워터 한            기 탑승 시간 때문에 애간장이             스크를 선호하는 이유는 편리

                                                                잔 찾으려다 이런 망신을 당하             타기도 하고 울화통이 터지기              함과 신속함 때문이다. 그러
                          ‘키        직원에게 중얼중얼 말을 걸 필            다니! 내 자존심이 급하게 곤             도 한다. 기계 보고 하소연 할            나 많은 사람들은 은행직원이
                        오스크         요가 없다. 영어도 짧은데 아            두박질치고 있었다. 혹시 뒤에             수도 없고 사람 돌아버리게 만             나 식당 종업원, 공항 카운터
                        (Kiosk) 공   주 편리해 보인다. 그런데 겉            서 있는 젊은것들에게 내 속              드는게 키오스크.                    에 앉아 있는 직원들과 대면하
                        포시대’        과 속이 다르다. 결코 쉽지 않           보이는 영어 실력이 들통난 게              터치스크린 방식의 무인단말              여 말하기를 더 즐거워한다는
                        에  우리       은게 키오스크다.                   아닐까? 에라, 핫워터고 나발             기를 키오스크라고 부른다. 영             것이다. 빠른 서비스보다 만남
                        는  살고        나는 보통 시니어 커피를 오            이고 집어치우자, 그래서 키오             어로는 Touchscreen Information   을 우선시한다. 대도시가 아니
                        있다.  키      더한다. ‘맥다방’ 커피는 항            스크 오더를 포기하고 슬그머              Delivery System이다. 근데 왜      라 한적한 시골 은행이나 식당
                        오스크         상 써서 문제다. 그래서 나는            니 자취를 감추고 있는 코리안             이게 유행인가? 당연히 비용              에선 찾아가는 손님들의 이름
       는 이미 여러해 전부터 노인들             항상 뜨거운 물 한컵을 달라             노인네! 그게 바라 나의 모습             절감 때문이다. 더구나 코로나             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곳이 적
       의 불편한 문명의 이기로 접              고 함께 주문한다. 쓴 커피와            이었다. 그렇게 키오스크는 노             팬데믹을 지나면서 얼굴을 마              지 않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
       근해 왔다. 코로나로 닫혀있              타서 마시기 위해서다. 뜨거운            인들의 자존심을 밟아버린다.              주 보다가는 바이러스가 전파              이 만나는 곳에 정작 삶이 이
       던 맥도날드도 다시 문을 열었             물 한잔은 공짜니까. 그런데             그 키오스크가 어디 맥도날드              될까 두려웠던 참인데 사람 대             루어지고 공동체가 형성된다.
       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주문             시니어 레귤러 커피는 단추를             뿐인가?  은행은  키오스크의             신 기계가 일을 대신해 주니               키오스크가 지배하는 세상이
       창구 바로 옆에 셀프오더가 가             눌러서 오더가 가능한데 도대             선도자 역할을 해 왔다. 은행             날개 달고 주가가 치솟아 오른             오면 결국 사람은 사라지고 말
       능한 멀쩡하고 잘생긴 기계 하             체 핫 워터가 눈에 띄질 않는            의 ATM은 완전히 대중화된 기            것이 키오스크다. 노스캐롤라              없는 기계와 동거하는 세상을
       나가 잡다한 메뉴를 가슴에 품             다. 장님이 코끼리 몸을 더듬            계다. 내가 다니는 카이저 병             이나의 한 크레딧 유니온에서              살아가야 한다. 모든게 탈인간
       고 버티고 서 있다. 그게 키오            듯 손가락으로 여기저기를 눌             원은 체크인이 거의 키오스크              는 셀프서브 키오스크를 사용              화되는 고독하고 삭막한 세상
       스크다. 갖가지 메뉴가 그림으             러 대다 보니 아이고, 그나마            로 전면 대체되고 있다. 영화             하면서 은행 창구 직원의 비용             의 출현이다. 장차 장례식장엔
       로 그려있고 가격도 선명하게              내가 이미 오더한 시니어 커피            관도 마찬가지다. 공항도 이미             을 40%나 절감할 수 있었다             조문객을 맞는 유족들은 사라
       나온다. 원하는 버튼을 꾹꾹              가 창에서 사라져 버린 게 아            오래전부터 시행되고 있다. 공             고 한다. 이러니 비용 절감 차            지고 조의금을 받는 키오스크
       누르고 크레딧 카드를 긁으면              닌가? 내 뒤에 길게 줄을 선 사          항 키오스크는 여권의 사진이              원에서 키오스크는 비즈니스               한 대가 떡 버티고 서 있는 때
       영수증과 오더 번호가 나온다.             람들이 나의 손가락을 주시하             붙어 있는 페이지를 스캔해 주             세계에선 없어서는 안될 대세              가 오지 않을까? 이 무인단말
       그걸 붙들고 있다가 음식이 나             고 있는게 보였다. 이러다가             어야 하는데 얼굴을 거꾸로 스             가 되고 있다. 사람 대신 일해            기 시대가 가져올 탈인간화를
       왔다고 누군가 소리치면 찾아              촌사람 취급, 노인네 취급은             캔했다고 다시 하라 하고 숫자             주는 키오스크에게 역기능이               어떻게 극복해 낼수 있을까?
       다 먹으면 된다. 쉬워 보인다.            당연하고 잘못하다가는 멍청              하나가 잘못 입력됐다고 모든              없을 리 없다. 바로 탈인간화                          <2면에서 계속>

       ■ 여용주 목사의 역사탐방 ■                                         에스파냐 측으로 돌아선다면               결실을 맺어, 자신의 고향에              교로 개종하기를 강요하였습
                                                                큰 권력과 지위, 그리고 막대             인디오 개신교회가 조직되었               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굳건한
                브라질 개신교회 역사 19                                  한 재화를 얻을 것이라고 약속             고, 1640년에는 이 교회당에            그의 태도로 그들의 모든 시도
                                                                하였습니다.                       서 신대륙 첫 인디오 어 성찬             가 실패하자, 에스파냐 인들은
                        뻬드로  뽀      부와 함께 에스파냐에 대한 인             그러나 뻬드로 뽀치는 단호하             예배가 드려지게 되었습니다.              1652년에 마침내 그를 감옥에
                      치(Pedro       디오 저항운동을 지휘하였습              였습니다. “나는 너와 네 부              뻬드로 뽀치의 순교                  서 꺼내어, 사우바도르와 에스
                      Poti)         니다. 그의 이러한 협력을 인            족이 부끄럽다. 이 많은 편지               선교와  정치,  그리고  군사          파냐에서 재판을 받기 위한 호
                       네덜란드가        정하여, 네덜란드 총독부는 그            를 내게 보내어 권하는 것이              분야에서 큰 활약을 한 뻬드              송이라는 명목 하에 바이아로
                      이처럼 신속        를 빠라이바(Paraíba)의 인디오        결국 우리 사이를 이간하여 내             로  뽀치는  1649년  2월  19        보내는 배에 실었습니다. 물론
                      하게 세력을        부족 대표로 임명하였고, 인디            상관들을 배신하라는 것이 아              일 뻬르넘부꼬의 과라라뻬스               그것은 그를 호송 도중에 죽이
                      확장할  수        오 부족 총회의 대표들도 그를            니냐? 오직 그리스도만 믿고              (Guararapes)에서 벌어진 제 2       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브              지지하였습니다.                    다른 우상들을 겸하여 섬기는              차 과라라뻬스 전투에 동족들              결국 그는 사우바도르에서 살
       라질 북동부 인디오들의 적극               그러자 에스파냐 측이 그에             너희들과 같지 않은 나는 기독             과 함께 참전하였다가 에스파              해당했습니다.
       적인 협력이었습니다. 1625년            대한 공작을 걸었습니다. 그             교인으로서 그렇게 할 수 없              냐 측에 포로로 잡혔습니다.               이렇게, 그는 인디오 순교자
       헨드릭츠 제독이 네덜란드로               에게는 펠리뻬 까마렁(Felipe          다. 나는 내가 진리로 확신하             그후로 약 3년간, 그는 팔과             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스파
       데려간 쁘띠과라 족 청년 중              Camarão: `camarão`이라는 성     는 신앙을 매일 실천한다. 만             다리에 늘 무거운 차꼬를 차              냐와 포르투갈의 역사가들은
       한 명인 뻬드로 뽀치는 레이              은 인디오 어로 뽀치 poty와 같         약 너희들이 저 교활한 포르투             고 그가 갇힌 지하감옥에서 매             오늘날까지도 그가 사우바도
       덴 대학에서 개신교 신앙과 네             은 뜻)이라는 사촌이 있었는             갈인들로부터 종교를 배우지               일 매우 비인간적인 고문과 채             르에서 에스파냐로 가는 도중
       덜란드 어를 배우고 1631년에            데, 그는 포르투갈 사람들로부            않았더라면 나와 같았을 것이              찍질을 당했습니다. 에스파냐              대서양에서 죽었다고 왜곡하
       브라질로 돌아왔습니다. 자기              터 로마 카톨릭 신앙을 받아들            다. 우리는 서로 싸우지 않아             인들은 그에게 하루 한 개의              고 있습니다.
       부족의 귀족계급 출신이던 그              여 에스파냐에 협력하고 있었             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포르             빵과 약간의 물만 주면서, 막                             여용주 목사
       는 귀국하자 마자 개신교 신앙             습니다. 그는 뻬드로 뽀치에게            투갈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              대한 포상을 약속하기도 하고                  (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과 신문물을 전하는 것에 힘썼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어, 그            판을 받게 될 것이다.”                무시무시한 협박을 늘어놓기
       으며, 네덜란드의 브라질 총독             가 만약 개신교 신앙을 버리고             뻬드로 뽀치의 동족 선교는              도 하면서, 그가 로마 카톨릭               www.nammicj.net
   1   2   3   4   5   6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