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 [남미복음신문_828호]2022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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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복음신문 www.nammicj.net 오피니언 2022년4월22일 금요일 5
사뿐만 아니라 아내와 절친인 해놨습니다. 단 하루 이틀이 사인 제가 당회와 임원들 중
정찬성 목사의 복음자리 이야기
여러 성도들에게 들었습니다. 라도 평안하게 쉬라는 그런 심의 구역회 그리고 남미 5개
그대 앞길에 축복 있으라! 강단여백에 썼던 여러 가지 정성이 묻어납니다. 나라 13교회가 남미선교지방
이야기들을 다 기억하고 각 드디어 한국방문 목적인 제 회를 열고, 연회대표로 동부
유권사님, 모습이 신바람이었습니다. 아 각 나름대로 인상 깊었던 우 81회 동부연회가 열렸습니 연회에 참석한 것입니다. 우
평안하시 내 또래 성도들이 장로님 되 리교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 다. 유권사님, 이번 연회는 동 리 지방을 포함한 24개 지방
죠? 한국의 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다. 일단 강단여백 함께 나누 부연회 567교회가 연말과 연 이 모이는 동부연회에서 아르
같은 지구 는 11시 30분 부활절 예배를 기는 본 궤도에 올랐다는 판 초에 교회에서 당회(공동의 헨티나 늘 푸른 교회의 배수
촌 안에 있 드리기 위해서 10시정도에 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 회)를 열고, 거기서 결의된 사 영 전도사가 목사안수를 받았
습니다. 같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정석윤 고 사람들을 열심히 만나면서 항이 구역회(당회)에서 논의 습니다.
이 봄꽃을 집사에게도 아들이 봉사하는 강단여백를 통한 쌍방 통행을 된 후, 20-30여개의 교회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안수보
보고 있고 아지랑이 산들바람 정동교회로 와서 함께 예배드 확장할 명함이나 전화번호 자 나눠진 지방회까지 달려온 의 좌를 맡아 한평생 주님을 섬
을 맞고 있습니다. 리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료들을 매일 정리합니다. 견을 500여 전후의 교회가 기는 종으로 결심하는 일에
저희는 지난주일 서울의 정 동부연회 참석을 위한 강원 그리고 동부연회가 열리는 한 단위로 묶인 연회로 집결 감독님들과 함께 손을 합해
동제일교회에서 모처럼 설교 도 횡성 방문 횡성감리교회로 이동을 했습 됩니다. 그리고 10개 연회 약 머리에 얹고 간구했습니다.
하지 않는 회중으로 예배를 유아부실에서 뛰어다니며 교 니다. 일부러 국도를 택해서 7000여 교회가 10월 중에 총 주의 종으로 부름 받은 당신
드리면서 천영태담임목사님 사들과 예배를 준비하는 또니 길 양옆의 풍경들, 진달래 개 회를 열어서 교회전체의 의견 의 딸이 한평생 좋은 목사로
의 설교와 웅장한 오케스트라 를 봤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나리 벚꽃과 금방 피어나기 으로 감리교회를 이끌어가게 살길 기원했습니다.
반주의 성가찬양에 큰 은혜를 들과 인사하고 커피 박사 박 시작한 엷은 푸름을 감상하며 되는 것입니다. 척박한 선교환경 가운데서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교회의 승준 목사 방에서 핸드드립 천천히 달렸습니다. 서울에서 배수영 전도사 목사안수 보 앞길에 축복이 있길 기도 했
모교회이며 아내의 모교회에 한잔을 얻어 마시며 우리가 점점 벗어나며 공기가 점점 좌하고 스톨선물 습니다.
서, 아내와 대학생 때부터 늦 보내는 강단여백을 잘 보고 더 싱그럽습니다. 해외에서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
은 나이까지 함께 신앙 생활 있다는 피드백을 확인했습니 들어와 기죽을세라 연회 총무 남미선교지방 브라질선교구 정찬성 목사
하던 이들과 교제를 나누는 다. 그런데 그런 말씀은 박 목 님이 너무 좋은 숙소를 예약 역 브라질선교교회 정회원 목 (브라질선교교회 담임)
[조명환의 추억여행] 아와 결혼하자 이에 분노해 갈 있는 것 같지만 페트라는 이것 는 없다. 그럼 왜 복음의 요람
릴리를 침공했다가 로마의 중 말고도 주변에 여러 유적을 통 인 예루살렘으로 향하지 않고
요르단의 협곡도시 페트라 재로 물러나기도 했다. 이 나 칭하는 도시 명칭이다. 알카즈 바울은 아라비아 사막으로 갔
바테아는 AD 6세기경에 지진 네 다음으로 유명한 앗데이르 을까? 일부 성서학자들의 주
으로 완전 폐허가 되면서 역 (수도원이란 뜻)는 높이만 해 장에 따르면 모세가 출애굽을
사 속으로 사라질 뻔 했다. 19 도 대도시 빌딩 10층짜리만 한 후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세기에 이르러 스위스 출신인 한 곳이다. 야외 신전 등 바위 받은 그 아라비아 사막에서 바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 곳곳을 깎아 만든 다른 건물들 울도 이제 옛날의 사울이 아니
(Johann Ludwig Burckhardt) 이 800여 개가 넘는다. 라 바울이란 새로운 ‘사도인
가 카이로로 가는 도중 페트라 기독교인들도 요르단 성지순 생’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고
에 관한 소문을 듣고는 숨겨 례에서 빼놓지 않는 이 페트 싶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
진 보물을 찾는다면서 여길 찾 라는 우선 애굽을 탈출한 모 다. 그러나 여기서 알고 넘어
아 떠났다. 하지만 여기 살던 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기 가야 할 부분은 다메섹 사건으
베두인들이 비무슬림 이방인 를 통과하여 가나안에 들어갔 로 사울이 바울로 이름이 바뀐
을 별로 환영하지 않았기에 그 다는 점 때문이고 아론이 죽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후
는 이슬람교도로 위장하고 그 호르산이 이 지역이라고 알고 에도 사울로 불린 적이 있기는
요르단의 페트라(Petra)는 아 이집트, 아라비아, 페니키아의 들과 친해진 끝에 1812년 발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약성 하지만 사울이란 히브리 이름
랍계 유목민이던 나바테아인 교차점에 있어서 중개무역과 견에 성공했고 드디어 유럽으 경에 나오는 에돔과 모압의 접 이 그리스식 이름인 바울로 바
들이 건설한 산악, 혹은 협곡 교통의 요지라는 이점 등으로 로 돌아와 여행기를 쓰면서 이 경지역에 자리한 이곳 페트라 뀐 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
도시였다. 페트라란 말은 그리 번영을 누린 도시였다. 그래서 도시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폐 는 회심한 바울의 첫 사역지로 하기 위함이었다.
스어로 ‘바위’란 뜻이다. 본 극장, 목욕탕, 상수도 시설까 허 속에서 다시 태어난 이 도 기록된 아라비아가 바로 이곳 페트라의 최고 유적으로 웅장
래 나바테아인들은 이곳을 레 지 갖춘 시대의 첨단을 달리던 시의 보존 상태가 엄청 좋아서 이였다는 주장도 있다. 바울이 한 26미터 높이의 건물이다.
켐(Rekem)이라고 불렀지만 도시였다. BC9년~AD40년 동 유럽인들을 감탄시켰지만 사 시리아의 다메섹 도상에서 회 25m 높이의 고린도식 기둥 6
로마가 이곳을 정복한 후 그리 안 나바테아 왕으로 재위했던 실 외양은 화려하고 웅장하지 심한 후 찾아간 곳이 왜 하필 개가 정면을 받치고 서 있는
스인들이 붙여놨던 페트라란 아레타스 4세는 갈릴리 분봉 만 지금 속을 들여다 보면 텅 페트라일까? 지도를 꺼내 놓 그리스식 건축 양식으로 기원
이름을 계속 사용하면서 오늘 왕 헤로데 안티파스의 장인이 텅 비어있는 상태다. 보통 페 고 봐도 시리아에서 페트라는 전 1세기경 나바테안 왕의 무
에 이르고 있다. BC1400년경 었는데 헤로데 안티파스가 자 트라 하면 대표적인 유적인 너무 먼 거리다. 바울이 회심 덤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부터 이곳에 도시가 번성했고 신의 딸을 버리고 제수 헤로디 ‘알카즈네(보물이란 뜻)’만 한 후 3년간의 기록이 성경에 <4면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