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 - [남미복음신문_843호]2022년 8월 5일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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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미복음신문  www.nammicj.net                                    오피니언                                                2022년8월5일 금요일


       ■ 여용주 목사의 역사탐방 ■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               거부하여, 칼리 선교사 부부와             성경학교를 세우고 곧바로 사
                                                                니다. 그러자 도무지 혼자서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               역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브라질 개신교회 역사 27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             다.                            칼리 선교사 부부는 그들의

                                                                는, 자기와 함께 이 일을 감당             칼리 선교사는 한동안 종교의             선교사역에 있어서 역할을 분
                        제임스  쿨      다. 그래서 그는 당대 내로라            할 선교사를 청빙했는데, 그가             자유를 찾아 마데이라 섬을 떠             담했는데, 사라 칼리 사모는
                      리  플레처        하는 지식인들, 특히 개혁적             바로 로버트 리드 칼리(Robert          나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공동             성경학교 사역을 담당하였고,
                      (James        성향의 자유주의자들과 브라              Reid Kalley) 선교사였습니다.        체를 돌보며 지냈습니다. 그러             로버트 칼리 선교사는 예배와
                      Cooley        질 황제인 뻬드로 2세와도 활             회중교회 선교                     던 중, 미국 장로교회 출신인             심방, 그리고 전도와 의료사역
                      Fletcher)     발하게 교류하였습니다. 그러              로버트 칼리 선교사는 스코틀             플레처 선교사의 브라질 사역              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들 사
                      목사의 선교        나 그는 자신의 이러한 대인관            랜드 사람으로, 장로교회 출신             청빙 제안을 받게 되었고, 마             역의 결과로, 3년 후인 1858
                      사역            계를 개혁된 복음을 전하기 위            외과의사였습니다. 스코틀랜               침내 1855년 5월 10일에 아내          년 7월 11일에 ‘플루미넹시
        감리교 선교사이자 미국 해              한 수단으로만 생각하였습니              드 장로교회에서 신학교육을               사라 풀튼 칼리(Sarah Poulton       (Fluminense) 복음교회’를
       군 함대 군목이던 키더 목사가             다. 왜냐하면, 이러한 범국가            받은 그는 중국 선교사로 지              Kalley)와, 또한 그들과 브라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는 교단
       철수하자, 1851년에 그의 후            적 개혁은 반드시 성경적 신앙            원했으나, 아내의 건강 때문에             질 선교에 동참하고자 하는 마             파송 선교사의 사역을 통해 브
       임인 제임스 쿨리 플레처 목              과 개혁된 교회를 통하여 이루            원거리 여행을 하지 못하여,              데이라 출신 평신도 몇 가정과             라질에 세워진 최초의 개신교
       사가 새로운 군목으로 부임하              어져야 한다고 굳게 믿었기 때            1838년에 마데이라(Madeira)         함께 히오 지 쟈네이로에 도착             회입니다.
       게 되었습니다. 그는 구 프린             문입니다. 열정적인 선교사역             섬의 선교사로 파송 받게 됩니             하였습니다. 당시 포르투갈 식
       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한 장로              을 펼치던 그는, 개신교가 브            다. 그는 그 섬에서 8여년 동            민지였던 마데이라 섬에 수년                              여용주 목사
       교회 목사로, 브라질을 자신의             라질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지면            안 의사와 선교사로 부지런히              간 살았던 그들은 다시금 새로                 (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제 2의 조국처럼 사랑하고 아             자연스럽게 개혁은 실현될 것             사역하여 1846년에 마데이라             운 언어를 배울 필요가 없었습
       끼는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브             이라고 전망하였던 것입니다.             장로교회를 조직하기에 이르               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남미복음신문
       라질이 아직도 중세 식의 구습              미국성서공회의 회원이기도              렀으나, 교회가 세워지자 마자             브라질에 도착한지 3개월만에                www.nammicj.net
       에 묶여 있는 것은 로마 카톨             한 그는, 그가 사역하던 20여           로마 카톨릭 사제들의 심한 핍
       릭 때문이라고 보고, 이 나라             년의 기간동안 하나님의 말씀             박으로 섬에서 추방당하게 되                            본 신문의 간추린 소식을 카톡으로 받고 싶으
                                                                                                          신 분들은 “카톡 아이디 kkkiu79”를 친구추가
       에 꼭 필요한 것은 사회적 개             을 알리기 위하여 수만 권의             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전도한                          하시고 “소식원함”이라고 메세지를 보내주시
       혁과 경제 성장, 그리고 정치             개신교 번역 성경을 브라질 곳            약 3천여명의 주민들이 로마
                                                                                                          면 매주 카톡으로 소식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적 발전이라고 생각하였습니               곳에 보급하였는데, 놀랍게도             카톨릭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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