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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선표 | 3·1운동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 11
동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밝히는 그런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이번 글은 그동안 조
사하며 수집했던 미국 언론의 3·1운동 보도 기사 중 극히 일부분만을 정리해 본 것
이다. 이를 계기로 향후 심층적인 연구가 본격화 되기를 기대한다.
1. 3·1운동에 대한 첫 보도
1) 일본 · 중국 신문의 첫 보도
3·1운동 발발 소식에 대한 일본에서의 첫 보도는 3월 3일자부터 시작되었다.
The Japan Advertiser는 3월 3일 “Trouble in Seoul over Yi Funeral(고종의 장
례식으로 서울이 번잡)”의 기사로 국내 3·1운동 소식을 처음으로 알렸다. 이 기
사에서 광무 황제의 장례식 예비행사 때 ‘소요사태’가 일어나 일본 경찰이 진압했
고 하세가와 총독이 소란을 경고하는 공고문을 발표했다고 전했다. The Japan
Advertiser는 일본 요코하마(橫浜)에서 인쇄업을 하던 미국인 로버트 마이클존
(Robert Meiklejohn, 1846~1904)이 1890년에 창간한 영자 신문으로 1908년
미국인 기자 벤자민 플레이셔(Benjamin W. Fleisher)가 매수한 후 1913년 본사
를 요코하마에서 도쿄로 이전해 발행되었다. 이 신문은 일본 고베(神戶)에서 발행
된 영자신문 The Japan Chronicle과 함께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갖고 보도한 일본
내 대표적인 영자 신문이다.
일본 국내 신문인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은 『재팬 애드버타이저』의 기
사 보다 더 자세하게 3·1운동 발발 상황을 전했다. 3월 3일 ‘조선 각지의 소요’란
기사에서 3월 1일 서울에서 학생, 노동자 수 천명이 시위운동을 일으켰고 그 중 주
모자와 선동자 112명이 체포되었다고 하였고 그 외 안동현과 평양, 의주, 진남포
에서도 시위운동이 일어났다고 전했다.
『대판조일신문(大阪朝日新聞)』은 3월 3일 ‘기독교인 조선인의 폭동(耶蘇敎
徒なる朝鮮人の暴動)’이란 기사에서 장례식을 앞두고 서울에 많은 사람들이 모
여드는 상황에서 3월 1일 오후 3시경 평안북도 선천과 의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는 급보를 전했다. 그리고 3월 1일 아침 서울의 남대문 앞에서도 배일 격문을 붙이
는 조선인이 있었고 조선의 주요 인물들에게 격문을 배포하였다고 전했다. 3월 1일
진남포에서 기독교인 780명이 불온한 문자를 쓴 깃발과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
를 외치고 시내를 돌아다니다 일본 경찰에 진압 당했는데 조선 각지의 기독교인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