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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연락하며 불온한 선언서를 살포하였다고 했다.
3월 6일 조선총독부와 일본의 당국자들이 3·1운동에 대한 보도를 해금하기
전까지 사실 엄격한 보도 통제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실제로 3월 3일이 되면
일본 내 언론들은 비교적 신속하게 3·1운동의 발발 상황을 보도하고 있었다. 그런
데 이후 계속된 3·1운동에 대한 일본 내 언론들의 보도 태도는 영자 신문의 경우 한
국인의 독립운동과 피해상황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 일본의 자국 언론들은 주로 일
본측의 인명과 시설 피해상황에 초점을 두고 3·1운동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데 중
점을 두었다.
중국 내 언론들도 한국 내 3·1운동 상황을 심도있게 보도하였다. 중국 내
첫 보도는 상하이에 발간되던 The North China Herald(北華捷報)의 3월 3일
자 보도이다. 오사카에서 보내준 전신을 통해 3·1운동 소식을 처음으로 전했다.
그 다음으로 The China Press(大陸報)의 3월 4일자 보도이다. 최근 이 신문 기
사가 발견되어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는데 “Thousands of Koreans Cry for
Independence”란 기사 제목으로 3·1운동 소식을 알렸다. 상하이의 영자 신문들
외에 중국의 자국 신문인 『민국일보(民國日報)』, 『국민공보(國民公報)』, 『시보(時
報)』, 『시사신보(時事新報)』, 『신문보(新聞報)』, 『익세보(益世報)』 등은 모두 3월
5일자부터 3·1운동 소식을 처음으로 보도하였다.
2) 미국 언론의 3·1운동 첫 보도
미국 언론에서 3·1운동 소식을 처음 보도한 때는 3월 10일부터다. 그 이후
부터 미국 내 언론들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주목하고 끊임없이 보도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3월 10일부터 미국 언론들이 3·1운동 소식을 보도하게 된
것인가.
국내에서 민족 대표들이 비밀리 3·1운동을 준비할 때 정동감리교회 목사인 현
순은 거사 이후 해외에서 외교와 통신을 담당할 목적으로 2월 23일 서울을 떠나
3월 1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최창식, 신규식, 이광수, 신헌민, 김철 등과
교류하며 3월 4일 아침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듣고 즉시로 상하이 거류 한인들을 소집해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3·1운동
소식을 전 세계로 알리는 역할을 추진했다. 그리고 국내외 주요 한인 대표자들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