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 - 성결과신학 V.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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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로 마비되었으나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다고 전했다.
                Omaha Daily Bee는 3월 17일자에 한국의 3·1운동은 여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안주에서 한국인 헌병대가 군복을 버리고 만세
            시위 군중들 속에 들어가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만세시위의 열성 때문에 평양 남쪽
            의 마을에서는 4명의 헌병경찰이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군중들에게 발포해 51명의
                                  3)
            생명이 빼앗겼다고 보도했다.
                Cincinnati Enquirer는 3월 17일자에 한국인 ‘폭도’들이 일본과 전쟁을 치루
            고 있다 하고 이 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여학생들도 이 저항운동에 참여했
                                                                    4)
            다고 했다. 교회는 폐쇄되었고 1,000여 명의 목사들이 체포되었다고 했다.
                미국 언론의 3·1운동 보도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영문 독립선언서
            의 보도다. 영문의 3·1 독립선언서는 The Sacramento Bee(The Daily Bee의 후
            신)의 발행인 겸 편집장이자 연합통신(AP) 아시아지국장이던 맥클래치(V. S.
            McClatchy; 1857~1938)에 의해 처음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다. 맥클래치는 부인
            과 함께 중국과 만주의 안동현을 거쳐 여행차 한국에 왔는데 그 때가 3월 3일부터

            3월 6일이었다. 이 짧은 기간 한국에 머무는 동안 그는 한국에서 일어난 3·1운동
            을 직접 목격하였고 한국에서 활동 중인 미국인과 유럽인 등 여러 외국인들을 만났
            다. 이들 외국인들을 통해 한국 정세에 대한 생생한 소식을 들었을 때 영문 독립선
            언서를 몰래 전달받고 도쿄로 건너갔다.
                맥클래치는 몰려 가져온 영문 독립선언서를 처음에 도쿄에 있는 The Japan
            Advertiser와 연합통신(AP)에 주어 보도를 시도했으나 일본 당국의 삼엄한 검열
            에 막혀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러다 그가 미국 본토로 가기 위해 하와이 호놀룰
            루에 잠시 체류할 때 비밀리 휴대한 영문 독립선언서를 그 곳 현지의 The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 (Honolulu Advertiser의 전신)에 처음으로 공개하였다.
                The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는 맥클래치가 호놀룰루에 도착한 3월 27
            일 바로 인터뷰를 가졌는데 이는 하와이에서 국내 3·1운동을 직접 목도한 사람과



            2)  “Korea Stirred By Uprising; 10,000 Stone Rail Depot,” Harrisburg Telegraph, March 18,
              1919.
            3) “Uprising In Korea Led By Girl Students,” Omaha Daily Bee, March 17, 1919.
            4)  “Riots Echo Korean Demands; Envoys Shape Draft Revisions,” Cincinnati Enquirer, March
              17,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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