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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КОРЕЙСКИЕ НАРОДНЫЕ ВЕСТИ 겨레일보 2021.        06.14 (화)  NO.4450
       ■ [송광호기잒 북한탐방 하이라이트] "남조선은 88올림픽으로 부흥"





























        ▲ (왼쪽부터) 북한 캐나다 식량은행에서 보낸 밀가루, 북한 식량돕기(한국 곡물), 북한에서 남한으로 보낸 구호물잒(쌀)
















         미주교포들은 워낙 방북 인원이 많다                 중호우 때문이다. 모두 189명이 사망하             그러나 당시 전두환 정부는 망설이다
         보니 걔 중에는 여러 종류, 성격의 사람              고, 약 35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결국 북측의 대남제의를 받아들였다.
         들이 생긴다. 이미 2천여 명의 미주교포              최악의 홍수사태였다. 서울의 경우 초중              북한적십자사의 수해 구호물자가 9월
         들이 북한을 다녀왔다. 그들은 관광이든,                                                 하순부터 5일간 판문점과 인천항 등지
         이산가족이든 북 어느 지역을 가든 할                   젖두환 젨부는 망설이다 결국                 로 전달됐다. 한국은 답례로 담요, 카
         말을 하고 기가 죽지 않았다. 그들 지갑                북측의 대남젯의를 받아들였다.                 세트, 라디오, 손목시계 등 선물 가방
         속의 두툼한 미화 때문인지. 김일성 부                북한젓십잒사의 수해 구호물잒가                  8백40여개를 북한에 증정했다.
         자 시기는 그래도 방북 분위기가 좋던                   9월 하순부터 5일간 판문젢과                북한이 인도적 차원에서 남한을 도운
         시절이다. 얘기가 다른 데로 나갔다.                 인천항 등지로 젖달됐다. 한국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날 밤 호텔 방에서 잠이 안 와 뒤척이                                                 남한당국은 이재민 당 쌀 33kg부터 66
         다 라디오를 켰다. 방송에서는 지난 84                 답례로 담요, 카세트, 라디오,               kg까지 분배해 줬다. 북한 쌀 품질이
         년 9월, 북에서 한국 수재민들에게 구호                    손목시계 등 선물 가방                 안 좋다느니 여러 평이 있었다. 그러
         품을 전달했던 예전 보도가 흘러나왔다.                 8백40여개를 북한에 증젨했다.                나 실향민들은 북녘 쌀로 제사를 지내
         “경애하는 김정일 동지의 남조선 구호                  북한이 인도젓 차원에서 남한을                 겠다는 등 가슴 뭉클한 반응 등 다양
         대책으로 조선적십자사 중앙위원회에서                     도운 것은 그때가 처음이잒                 했다. 그때 북한적십자사의 지원은 6.
         는 5만 석의 쌀, 50만 미터의 천, 10만                     마지막이었다.                  25전쟁 이후 최초의 물자교류로서 얼
         톤의 시멘트를 남조선 수재민에게 보내                                                   어붙은 남북관계에 물꼬를 트는 역할
         고···” ‘아니 만 8년 전 구호 사건                                                 을 했다. 다음 해 1985년에는 그간 중
                                             고는 물론 대학교까지 휴교령이 내렸다.
         을 아직도 방송, 선전하고 있다니··                이러자 북한은 며칠 뒤 남한 이재민들을              단됐던 남북적십자 본 회담이 재개됐
         ·’ 이는 예전 서울에서 발생했던 수재               위해 구호물자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고, 그해 9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
         민을 북에서 도왔던 스토리였다. 남북                                                   북이산가족행사가 열렸다. 첫 고향방
                                             남조선이재민들에게 쌀 5만석, 옷감 50
         관련해 이 과거 사실을 의외로 망각한                만m, 시멘트10만 톤 등을 보내겠다는 공            문단으로 일부 이산가족상봉이 진행
         사람들이 많다. 잠깐 이를 언급한다.                식적인 제의였다.                          됐다. 그 후 다음 이산가족 상봉은 우
         지난 1984년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한                                               여곡절 끝에 15년 세월이 흐른 뒤인 2
                                             그때 한국은 직전 해인 1983년 10월 버
         국 일부 지역은 엄청난 수해 피해를 입               마(미얀마)에서 발생한 아웅산 테러사건              000년에 가서야 다시 이루어진다.
         었다. 서울, 경기, 충청지방에 내린 집              으로 앙금이 채 가라앉지 않던 시점이다.              (북한탐방 12회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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