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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둘
폐역(廢驛)
대한파킨슨병협회 전 상담사 고요스타(2001 진단)
생이란 저마다 정해진 평행선을 따라 오른 전국 모임에서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궤도를 타고 종착역을 향해 숙명적으로 달려 없던 얼굴들. 어쩔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쓰
가는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그 길의 진행은 린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이지만 서로 상처
알 길이 없으며 위험도 아직 모른다. 모두 달 를 매만지며 동기간 만큼 진한 우애로 뭉쳐
리는 철길에서 안전하기를 바랄 뿐이다. 여 있다. 정보를 나누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
름 뙤약볕에 지친 초록 잎들이 울긋불긋 단 는 우리는 길동무다.
풍으로 이울어 고단한 질주를 잠깐 쉬어 가
려 한다. 철길 깊숙이 다가온 가을에게 작동 전성기를 보내고 흔적만 남은 폐역을 돌아본
을 멈춘 지 오래된 낡은 레일 위 이야기를 전 다. 많은 사람이 바쁘게 오가던 시절, 활기차
한다. 게 승객을 태우고 물건을 실어 나르던 때를
끄집어냈다.
구겨 넣듯 아침 약을 입속에 밀어 넣어야 안
심이 된다. 유유히 흐르는 리듬을 타고 아주 누구에게는 삶의 애환으로 또 다른 사람들에
천천히 구석구석 잘 돌아간다. 약이 주는 물 게는 사랑과 낭만이 가득했던 경춘선 끝자락
리적인 힘에 의지해 계획을 세우며 시간을 간이역을 그리움에 찾아가 보아도 맞아 주는
쪼개면 매일 거의 변화 없는 일상이 이어진 이 하나 없다. 왕성했던 의욕도 세월과 함께
다. 산다는 것 자체가 큰 별일이 없음을 오히 희미해지고 지금 이곳은 힘없는 노년처럼 쓸
려 다행으로 여겼다. 쓸하다.
포기하듯 서 있던 내게 확진을 알리는 의사 내가 살고 있는 노원구는 넓은 평야 지대에
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는 충격으로 온몸을 갈대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흔적
흔들었다. 그러고 나를 돌아보며 생각에 잠 조차 남지 않아 잠시 잊고 있었지만 바람 따
겼다. 라 넘실대던 갈밭에서 가을의 소리를 듣는다.
그림 같은 풍경을 안고 앉아 있으면 나뭇잎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나?” 사이로 보이는 퇴색한 침목과 레일이 흘러가
버린 시간을 기다리게 한다. 오가는 발길 없
사람들 앞에 서기가 부끄러웠다. 중벌을 받 는 폐역 앞마당에서 마른 풀꽃과 낙엽이 쓸
는 죄인처럼. 쓸한 냄새를 풍기지만 흩어진 시간을 힘써
모아 우리 생의 기차는 다시 달려간다.
20여 년의 시간은 아픔으로 얼룩져 눈물과
희망이 뒤엉켰다. 힘들어질수록 정신을 곧추 전화번호를 찍었다. 모두 부재중이라는 사무
세우고 시야를 넓히기에 노력했다. 길고 어 적인 음성만이 귓가를 어지럽힌다. 보고 싶
두운 터널을 지나면서도 언젠가 빛이 들어올 다.
바깥을 꿈꾸었다. 고단했던 시간도 꺼내어
펼쳐 놓으면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지금은 사람들의 발길이 떠나버린 이곳에 다른 바람
젊은 시절을 몽땅 내어주고 남겨진 추억만 이 불길 바란다. 우리 환우들이 좋은 소식을
되뇌이고 있지만, 환우들과 같이했던 시간이 애타게 기다리듯이 기차가 달리던 때 들리던
지울 수 없는 보람으로 남아 있다. 북적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본 소식지에 올릴 환우와 보호자의 파킨슨병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010-8229-6219
이른아침 까치소리 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