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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이은선│ 왜 3·1운동을 기독교인들이 일으켰다고 하는가? 73
박명수 많은 사람들이 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당시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 있
었는데, 국내나 해외에 만들어진 임시정부가 여러 개 있었습니다. 공통점 하나는
모든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세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로
비한 것도 아니고 멀리 미국에 있어서 국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이승만이 한국을 대표하는 국무총리라던가 대통령이라던가 중요한 자리에
세워질 수 있었을까. 이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대한인국민회가 1918년 11월25일에 민족대표를 뽑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민족대표가 이승만이에요. 도산 안창호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이었죠. 그
리고 누가 민족을 대표해서 윌슨에게 이야기를 할 것인가가 중요하죠. 당시 일본에
도 이 소식이 퍼졌고 상해에도 퍼졌고 러시아에도 퍼졌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이
승만을 대표로 파견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승만의 위치가 중요해졌다고 생각해요.
당시 세계에서 힘센 사람이 누구입니까? 윌슨 대통령입니다. 윌슨의 제자가 이승만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윌슨이 한국을 도와줘야 한국이 독립을 할 수 있는데, 제자
가 독립운동을 하는데 도와줘야 하지 않겠냐?’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승만을 대표로 선출했습니다. 미주 대한인국민회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더라
고요.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가 만주나 노령(露領)에 다 배포되고 있
어요. 이승만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가 다 알려지고 있어요. 이런 측면에서 한국사
람 머릿속에는 이승만이 우리 민족대표로 선발되었다고 아는 거죠. 그렇게 해서 선
우혁이 이승훈한테 “이승만이 대표로 선발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도 김규
식을 보내야 한다.” 임영신도 “1919년 상해에서 독립단원이 왔는데 이승만 박사가
우리가 파리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는데 국내에도 독립운동을 해야 가능하다. 이렇
게 이야기했다. 그러니 우리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 사람
들 간에 이승만이 대표로 간다는 것이 널리 퍼져있고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난 뒤
미국에서 전보를 보내 이승만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게 현순의 전보일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 사람들이 “이승만이 우리의 대표인데 어디 있느냐 빨리 나와서 우리 독립
을 이뤄 달라.”고 합니다. 이승만 대표가 민족대표가 된 것은 그런 요소가 있고요.
현실적 요소로 생각하면 당시 임시정부를 도울 수 있는 게 미국 교포들 밖에 없습
니다. 러시아 교포들 돈 없고 만주에 사람들이 없고 안창호는 미주 본토 교포를 대
표하는 사람이고 이승만은 하와이를 대표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지원
해줘야 임시정부가 운영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경제적인 요소가 같이 있어서 이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