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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이은선│ 왜 3·1운동을 기독교인들이 일으켰다고 하는가?  69



               “한국의 상황을 미국본부에 정확하게 알려 달라.”고 이야기를 했고, 영국 의사는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토마스가 기록한 편지와 자기가 본 상황을 미국 해군을 통
               해 성결교를 만들게 한 선교회 본부(미국 동양선교회)에 보내게 했습니다. 그것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이것이 에즈베리대학이 있는 켄터키 윌모어에 전달이 됐습니다.
               여러 통로로 한국 상황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은선   당시 3·1운동이 일어났고 그 결과 가장 중요한 산물은 국민이 주인되는
               나라가 세워져야 된다는 건데, 그것이 임시정부로 결실을 맺지 않았습니까? 임시

               정부 수립에 관하여 기독교가 미친 영향을 설명해 주십시오.


               박명수   아까 말했듯이 3·1운동을 준비단계, 실행단계, 후속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가 후속단계고 이것이 임시정부라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3·1운동만 기념했는데 올해는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이라고 해서 임시정부도
               중요하게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매우 잘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3·1운동은

               1919년 한 번 일어났지만, 임시정부는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계속 노력한 거니
               까요. 그러면 임시정부를 만드는데 기독교인이 어떤 역할을 했느냐.
                  33인 민족대표가 3·1운동을 일으키면서 임시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 있기 어렵고 외국에 만들어져야 된다는 생각을 했
               어요. 외국에 만들려면 영어를 잘 하는 국제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이 일을 주도해
               야 하니까 천도교의 한계가 있는 거죠. 천도교는 국내에서 3·1운동을 할 수 있지만
               해외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영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니니 기독교에게 맡겼고 이승훈이

               현순 목사에게 부탁했어요. 현순 목사는 통역을 오래한 사람이라 영어를 잘 하고
               국제관계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현순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2월 중반 미리 상
               해를 향해 떠났습니다. 임시정부를 만들기 위해서 간 거죠.
                  상해에는 신한청년당원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1919년 1월말 각지로 흩
               어져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 결과 3·1운동이 일어났고 곧 바로 상해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거죠. 여기에 속한 사람이 선우혁, 김철, 여운형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주

               로 상해한인교회 신자들인데 그 다음 한성정부를 만들었던 이규갑 목사를 중심으
               로 기독교 세력이 도착했고, 노령, 만주에 있던 사람들이 도착했고, 1919년 5월에
               안창호가 미국에서 옵니다. 이게 매우 중요하다 생각해요. 안창호가 기독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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