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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이은선│ 왜 3·1운동을 기독교인들이 일으켰다고 하는가?  65




               이은선   당시 313개 군이 있는데 2개 군을 빼놓고 311개 군 전국에서 다 일어났
               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리고 학생들이 많은 영향을 받게 만든 건 일제가 서
               울에서의 집회를 막기 위해 모든 학교를 다 휴교를 시켜버렸더라고요. 결국 학생들
               은 다 지방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미션스쿨 다니는 학생들이 교회에 좋은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당시 기독교가 당했던 피해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가장 많이 주도를
               했으면 당연히 그 피해도 제일 많이 입었을 것 같습니다.



               박명수   일본은 선교사와 기독교가 3·1운동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교
               사들이 부정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신문에서는
               선교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기독교를 미국의 앞잡이로서 일본을 반대하는 세
               력이라고 매도 한 거지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3·1운동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모의
               를 어디서 했느냐 굉장히 중요합니다. 모의를 할 때 안전한 지역에서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대부분 선교사와 관련된 곳에서 했어요. 평양에서는 마우리 선교사 집에
               숨어서 모의를 했고, 이승훈은 평양에서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기홀 병원에 입원해
               거기에서 사람들을 모아 모의를 했고, 세브란스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더라고
               요. 외국에서 세브란스로 약품이 오고 가는 행랑을 통해 중요한 문서를 외국으로
               보냈더라고요. 그리고 3·1운동 바로 전날 정동교회에서 학생들이 모였어요. 그 장
               소에 이갑성이 가서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었거든요. 그러니까 교회, 선교사의 집,
               병원 이런 장소가 모임의 중심 장소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교사나 기독교가 일본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
               다음에 평양 신학교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했는데, 신학교 학생 5명인가를 잡아
               다가 너희들은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십자가 맛을 보라고 십자가에
               묶어놓고 매질을 했다는 것입니다.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선
               교사들이 자기나라에 보내는 편지에 아주 대표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내용

               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제암리교회에 기독교인들, 천도교인들을 다 잡아
               넣고 불 질러 버렸습니다. 교회를 3·1운동이 일어난 모의장소로 본거지요. 전체 피
               해자 가운데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17%, 천도교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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