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7 - 성결과신학 V.42
P. 67
66 성결교회와 신학 제41호 (2019 봄) 특별대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당시 기독교인 인구는 1% ~ 1.5% 밖에 안 되는데
피해자는 17%가 기독교인이었고 천도교는 기독교보다 10배 이상 신자가 많다하
는데 기독교보다 숫자가 적은 11%가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어떤 집
단보다도 기독교가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말 할 수 있는 거지요.
이은선 그러면 교수님 말씀대로 기독교인의 숫자가 전 국민의 1% ~ 1.5% 정도
밖에 안 되는 소수 사람들이었는데 감옥에 간 사람들은 17%가 될 정도로 많은 피
해를 입었고 일본이 그렇게 경계했다면 그 기독교의 영향력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박명수 영국이나 다른 나라가 식민지 정책을 하는 것과 일본이 우리나라를 무
단통치하면서 식민지로 갖는 것은 다르잖아요. 영국과 같은 나라는 식민지를 통
해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 정도로 끝나지만 일본은 한국을 완전히 일본화 시키려고
했습니다. 무단통치 기간 동안 일본은 모든 영역을 다 장악 한 거지요. 그런데 일
본사람들이 한국사람은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미국이나 영국사람들은 함부로
할 수 없거든요. 왜냐하면 미국이나 영국이나 서구 국가가 일본을 묵인해 주지 않
으면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선교사
와 관련되어 있는 교회에 대해서는 함부로 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일종의 치외법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단통치 기간 중에도 한국 사람들
이 교회라는 자그마한 숨통을 통해 세계와 연락하고 세계를 향해 나갈 수 있는 구
실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3·1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또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1910년 한일병합을 통해 우리
나라가 일본에게 먹혀 들어갈 당시 한국 기독교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는 것입
니다. 1907년 대부흥 운동을 통해 영적으로 각성했고 1907년 장로교의 독로회
가 만들어졌습니다. 제도적으로 스스로 설수 있는 힘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1911년 신구약성경이 다 번역돼서 성경을 일반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됐습니다.
1912년엔 한국 사람들이 주도하는 장로교 총회가 만들어졌다고요.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모든 것을 장악하는 가운데 한국 기독교
는 자체적인 민족교회로서 오히려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다 장악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 기독교는 오히려 성경이 번역되고 장로교 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