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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이은선│ 왜 3·1운동을 기독교인들이 일으켰다고 하는가?  67



               회가 성립되고 한국 사람들이 총회장을 하고 자생력을 키워가는 있었습니다. 이런

               힘이 결국 1919년 3·1운동을 만들었으며 이런 측면에서 한국 사람들이 민족공동
               체를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은선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가장 힘 있는 조직이 유교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
               데 그 사람들은 거의 참여를 안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인들이 바로 세계와
               교류할 수 있었고 세계의 문화를 앞장서서 수용할 수 있었으며, 민족 자결주의를
               가장 먼저 이해하는 선각자 집단이었다는 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세계 흐름에 능동적으로 따라가면서 우리나라를 새롭게 만들려 했
               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도 듭니다.


               박명수   한일병합이 일어났을 때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민주주의 국가를 만든
               다는 것은 별로 생각 못했고 조선 황제가 다시 복권되어 대한제국이 회복되는 것
               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좌절이 됐다고요. 왜 좌절 됐느냐. 원래 제1차 세계

               대전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오스트리아도 황제가 있었고
               독일도 황제가 있었다고요. 그리고 중국에서도 원세개가 다시 황제가 되려고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신한혁명당이라는 단체가 독일의 황제, 중국의 원세계, 그 다
               음에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를 엮어 뭔가 만들려고 했는데 민주주의 국가 미국이 여
               기에 참여하고, 독일이 패배하고, 황제가 지배하는 구체재가 끝났다고 하는 것입니
               다. 또한 영국이나 프랑스의 힘도 약해졌습니다. 서구 여러 나라에서 제국주의 시
               대가 끝나고 민주주의 시대가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교 중심, 왕 중심, 봉건질서 중심의 과거는 지나가고 미국을 대표로하는 민
               주주의적인 새로운 세계가 왔다는 것을 제일 잘 이해할 수 있는 집단이 기독교 밖에
               없는 거지요.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가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최
               근 역사서를 보면 한국의 3·1운동을 단지 과거에 민족독립만 이야기하지 국제적인
               상황에서 3·1운동을 보려하는 해석이 많지 않은 것은 상당한 유감입니다.



               이은선   이제 3·1운동을 우리가 평화적으로 진행했음에도 일제가 군대까지 동원
               해서 강압적으로 탄압했는데 그것이 알려지면서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국
               제적으로 알려지는데 선교사님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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